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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사라져가는 ‘작은 거점들’ 가끔 들르는 골목 안 책방이 있다. 퇴근을 서두르다가도 ‘오늘은 책방 갈까’ 생각하면 느긋해진다. 눈빛을 주고받으며 움직여야 부딪치지 않을 만큼 작은 공간이지만 그곳의 서가를 보면 사람들이 요즘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다. 책방의 유리문 앞에는 메모와 포스터가 빼곡하다. 새 책 소식만 있는 건 아니다. 놓칠 뻔했던 소규모 공연, 전시, 책읽기 모임, 반딧불 같은 약속의 말을 읽는다. 긴급한 사회적 의제에 대한 공동체의 발언이 붙은 날도 있다. 다들 뭐하고 지내나 했더니 이렇게 사는구나 싶어서 맥박이 건강하게 빨라진다. 나보다 앞서 책방에 들렀던 품위 있는 길고양이가 스르르 자리를 비켜준다. 동네책방에 가는 일은 이렇게 유익하다. 그날은 어린이 한 분이 책방을 향해 돌진하듯 달려왔다. 어서 들.. 더보기
아왈처왈 我曰, 半讀千字 半開心門(아왈, 반독천자 반개심문)妻曰, 讀五百字 風增二倍(처왈, 독오백자 풍증이배)내가 말하기를, 천자문 반을 읽으니 마음의 문이 반이 열리네처가 말하기를, 오백자 읽더니 뻥이 두 배로 늘었네 코로나19가 얼마간 잦아들어 골라낸 글이다. 한문 공부를 하겠다고 천자문을 펜으로 쓰기 시작했고, 붓을 잡거나 한시를 쓰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었다. 그냥 한문을 좀 써보고 싶었다. 그런데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한시가 나오게 되었다. 나왔다고 말하는 것은, 천자문 반쯤 쓰고 그걸로 한시를 쓰리라 작정한 바는 없었다는 말이다. 정말 그냥. 장난 삼아…. 지금의 한시도 뭐 대단히 깊어진 바 없지만 저런 농담도 할 수 있어서 그 재미로 또 주욱 써 왔다. 그런데 2020년 봄이 되어 세상이 심각하게 달.. 더보기
고전에서 길어 올린 삶의 지혜 호메로스의 를 읽고 나면 당혹감이 든다. 신화를 읽는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이 서사시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다. 오디세우스가 10년에 걸쳐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신화의 얼개와 상당히 유사하다. 유혹을 떨쳐버리고 잇따른 위험을 지혜롭게 이겨내 마침내 귀환에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신화는 흔히 주인공이 과거보다 성숙해지고, 타인을 위한 희생을 통해 영웅으로 발돋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에서는 그런 면을 읽을 수 없다. 아내를 지키고 왕국을 되찾을 뿐이다. 뭔가 다른 독법이 필요하다. 고전학자 김헌은 에서 를 인상 깊게 분석했다. 흔히 오디세우스의 방황이 10년이라 하지만, 8년 동안은 아이아이섬과 오귀기아섬에 머물면서 풍요와 환락의 삶을 누렸다. 특히 칼립스는 영원한 젊음과 건강, 그리고.. 더보기
[숨]온라인 공연에 대한 단상 공연장의 문이 굳게 닫히고 모든 것이 이대로 영영 멈춰버릴 것만 같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공연의 세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닫힌 공연장 문 안에서, 스튜디오에서, 집 안에서 음악가들은 계속해서 공연을 만들어내며 이를 온라인으로 송출하고 있다. 지난 주말만 해도 서울남산국악당은 네이버TV로 혜원·민희의 ‘남창가곡’ 녹화 중계를 선보였고 음반사 도이체그라모폰은 유튜브로 조성진의 독주회를 상영해 많은 시청자를 모았다. 약 2주 전 레이디 가가는 대형 페스티벌 수준의 라인업을 갖춰 의료계 종사자들을 위한 초대형 온라인 자선 콘서트 ‘원 월드: 투게더 앳 홈’을 개최했다. 온라인 공연, 무관객 공연, 공연 녹화중계, 실시간 생중계 등 제각각의 이름과 형태를 지닌 이 반짝이는 콘텐츠들을 작정만.. 더보기
[몸으로 말하기]춤추는 남자 언제부터인가 여성이 압도적이었던 무용계에 남성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현대무용 분야에서 그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그 요인 중 하나로 힙합을 들 수 있다. 거리에서 춤추던 힙합 춤꾼들이 순수예술로의 진입을 시작한 것이다. 힙합의 살벌한 춤 겨루기가 배틀과 동지애를 동시에 포함한 유희성으로 서로를 끌어들이는 것이 최근 세계적으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전 세계 청년 세대들을 압도적으로 사로잡은 이 묘한 춤의 매력은 당분간 이 땅에서도 지속될 것 같으니, 현대무용에서도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들어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 힙합 무용수들이 나타나고 있으나 기상천외하게 몸을 다루는 스릴을 만끽하게 하는 힙합 춤은 신체 공학적으로 남성에게 유리하다. 힙합 춤을 잘 추는 무용수를 보면 먼 옛날.. 더보기
[문화와 삶]이별의 풍경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은 건 20대 초반이다. 그때 서른은 너무 멀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가사는 더욱 멀었다. 하루하루가 만남으로 가득 찼다. 서른이 되어 다시 들었다. 가사의 다른 내용은 조금 와 닿았지만 삶에 이별은 그다지 없었다. 고작해야 한두 번 연애의 끝이 전부였다. 또 10년이 지났다. 이별의 경험은 그제야 인생에 몇 페이지씩 쓰였다. 친구들을 떠나보냈고 음악 영웅들의 부고 기사를 썼다. 가까운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짧건 길건 마음을 뒀던 공간과의 이별도 있었다. 때로는 그것이 더 힘들었다. 4월의 마지막 주말,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이맘때의 제주는 서서히 봄의 절정을 향해간다. 옥빛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은 시리도록 평화롭다. 여느 때의 여행이었다면 온전히 .. 더보기
산울림 ‘청춘’ 세대를 관통하면서 사랑받는 노래가 있다. 산울림의 노래 ‘청춘’이 그렇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1981년 이 노래가 발표됐을 때 세상은 삼형제 밴드 산울림의 ‘파격’에 화들짝 놀랐다. 그 ‘파격’을 권력자들은 ‘반항’으로 읽었다. 김창완은 애초 ‘청춘’의 가사가 “갈 테면 가라지/ 푸르른 이 청춘”이었으나 심의에서 너무 염세적이라는 이유로 반려돼 개사한 거라 했다. 또 2절 마지막은 “정 둘 곳 없어라/ 텅 빈 마음은/ 차라리 젊지나 말 것을”을 순화해 “정 둘 곳 없어라/ 허전한 마음은/ 정답던 옛 동산 찾는가”로 바꿨다. 그는 청춘을 향해 “갈 테면 가라”고 소리치고, “차라리 젊지나 말 것을”이라고 원.. 더보기
[기자칼럼]접촉은 이어져야 한다 얼마 전 아주 생소한 경험을 했다. 최근 공개된 영화의 감독을 화상으로 만났다. 다른 언론사 기자 5명과 함께하는 ‘라운드 인터뷰’ 자리였다. 인터뷰 시작 15분 전에 홍보담당자가 고지한 인터넷 링크를 통해 접속했다. 이미 다른 언론사의 기자 한 명이 ‘화상 인터뷰 방’에 들어와 있었다. 얼굴과 이름을 보니 10여년 전 다른 출입처에서 만났던 기자였다. 반가운 악수와 웃음 대신 건조한 채팅으로 해후했다. 인터뷰에 응할 감독이 화상대화방에 들어오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기자 중 일부는 마이크를 통해 육성으로 질문을 했고, 나를 비롯한 몇몇은 채팅창을 통해 진행자에게 질문을 전달했다. 질문의 진의는 감독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 얼굴을 보고 있었다면, 질문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