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들르는 골목 안 책방이 있다. 퇴근을 서두르다가도 ‘오늘은 책방 갈까’ 생각하면 느긋해진다. 눈빛을 주고받으며 움직여야 부딪치지 않을 만큼 작은 공간이지만 그곳의 서가를 보면 사람들이 요즘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다. 책방의 유리문 앞에는 메모와 포스터가 빼곡하다. 새 책 소식만 있는 건 아니다. 놓칠 뻔했던 소규모 공연, 전시, 책읽기 모임, 반딧불 같은 약속의 말을 읽는다. 긴급한 사회적 의제에 대한 공동체의 발언이 붙은 날도 있다. 다들 뭐하고 지내나 했더니 이렇게 사는구나 싶어서 맥박이 건강하게 빨라진다. 나보다 앞서 책방에 들렀던 품위 있는 길고양이가 스르르 자리를 비켜준다. 동네책방에 가는 일은 이렇게 유익하다.
그날은 어린이 한 분이 책방을 향해 돌진하듯 달려왔다. 어서 들어가시라고 했다. 곧장 서가에서 책 한 권을 뽑아 드는데 동화 제목이 <플레이 볼>이다. 야구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씩 웃고 대답 없이 책에 몰입한다. 야구도 그 책도 매우 좋아한다는 뜻일 테다. “초등학교 2학년 단골고객이에요. 항상 저 책을 몇 장 읽고 나서 다른 책들을 둘러보기 시작해요.” 책방 주인이 소곤소곤 말해주었다.
주인공들이 잘 있나 궁금해서, 이미 대화까지 외워버린 장면이지만 몇 줄 좀 읽어주어야 마음이 놓이는 그런 책이 어린 날의 우리 기억에도 있다. 양육자가 따라 들어오더니 부탁해둔 책을 받은 뒤 몇 권을 더 고른다. 어린이와 그의 가족은 오늘 밤 두근거리며 새 책을 읽을 것이다.
사춘기, 고요, 이층, 대륙, 북스피리언스, 커피는 책이랑, 달팽이, 완벽한 날들, 오늘, 무사, 사슴, 그림책산책, 같이, 곰곰, 동아, 동양, 불광, 만춘, 진부, 비플랫폼, 위트앤시니컬, 그레타, 타샤의, 오나의, 밤의 서점, 그 밖에 수많은 책방의 간판들을 생각한다. 이곳에서만 가능한 일들이 있다.
어린이 고객은 머리 위에 쏟아붓는 책, 얄팍한 눈치를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나만의 그 책을 만날 것이다. 지난번에 가져간 작품은 괜찮으셨냐고, 질병관리본부장님처럼 정중하게 의견을 묻는 책방 주인에게 “뭐, 그냥!”이라고 무뚝뚝하게 소감을 말하는 것도 동네책방의 어린이 손님에게는 흔한 기쁨이다. 온종일 사무실의 고성과 씨름했던 누군가는 여기 들르는 잠깐을 틈타 내일 자신과 함께 출근할 용기의 문장을 고르며 침묵의 자유를 즐길 것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 읽는 사람이 상대의 감도를 직접 확인하는 교점도 동네책방이다. 절멸의 경고등이 뜬 상품으로 가게를 낸 사람들의 결연함은 고귀하다. 최초의 독자이기도 한 책방 사람들은 서가가 좁기 때문에 최대한 정성껏 책을 골라 진열한다. 미리 읽고 손글씨로 적어둔 책 소개 글은 전략을 모르는 정직한 비평이다.
얼마 전까지 타인이었지만 책에 기대면 이웃이 된다. 한 권의 책을, 작가와 시인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책방 손님들은 서로 무형문화재를 만난 것처럼 반긴다. 모임을 꾸리고 불규칙한 취향과 가치의 연대를 결성한다. 외면이 상식이 된 코로나19의 시대에 환대의 보루는 이러한 작은 공간들의 공공성이다.
작아서 공공성이 높은 것은 책방만이 아니다. 안심 귀가는 예로부터 구멍가게들의 몫이었다.
5월10일은 13년 동안 망원동을 지킨 한강문고가 문을 닫는 날이다. 5월22일에는 아동청소년문학 전문서점 책방사춘기가 오프라인 영업을 종료한다. 다음은 어디가 될지 모른다.
책으로 등대가 되어 어린이를, 말수가 적고 상상이 많은 사람들을 지켜주었던 곳들이 코로나19의 위기 속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등불을 끈다. 작은 공간들을 지킬 방법은 없을까. 더 늦기 전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거점은 사라지기 쉽고 만들기는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d@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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