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이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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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이별의 풍경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은 건 20대 초반이다. 그때 서른은 너무 멀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가사는 더욱 멀었다. 하루하루가 만남으로 가득 찼다. 서른이 되어 다시 들었다. 가사의 다른 내용은 조금 와 닿았지만 삶에 이별은 그다지 없었다. 고작해야 한두 번 연애의 끝이 전부였다. 또 10년이 지났다. 이별의 경험은 그제야 인생에 몇 페이지씩 쓰였다. 친구들을 떠나보냈고 음악 영웅들의 부고 기사를 썼다. 가까운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짧건 길건 마음을 뒀던 공간과의 이별도 있었다. 때로는 그것이 더 힘들었다.


4월의 마지막 주말,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이맘때의 제주는 서서히 봄의 절정을 향해간다. 옥빛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은 시리도록 평화롭다. 여느 때의 여행이었다면 온전히 풍경을 즐기며 감상에 젖었을 테다. 현지인들만 아는 식당에서 현지인들만 먹는 식재료를 안주 삼아 부어라 마셔라 낮과 밤에 취해들었을 테다.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어느 공간과 이별하러 간 일정이었기 때문이다. 10년의 영업을 마친 한림읍 협재리의 게스트하우스, ‘쫄깃쎈타’를 마지막으로 보러 갔다.


만화가 고필헌(메가쑈킹)이 제주에 내려가 세운 쫄깃쎈타는 제주 여행의 흐름을 바꾼 공간이다. 아름다운 제주 바다 중에서도 협재의 바다는 단연 아름답다. 동남아에서나 볼 법한 옥빛 바다 건너편에 <어린왕자>의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을 닮은 비양도가 있다. 가장 완벽한 풍광이다. 쫄깃쎈타가 문을 연 2011년만 해도 협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20세기의 유산인 민박 몇 채가 있었을 뿐, 그 흔한 편의점 하나 없는 곳이었다. 나름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필헌은 트위터 하나로 협재를, 쫄깃쎈타를 알렸다. 게스트하우스 건립과정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며 그의 팬과 제주를 동경하던 이들의 관심을 몇 달에 걸쳐 올려놨다. 그해 여름, 문을 열자마자 늘 만실이었다. 성수기와 비수기, 주말과 평일의 구분도 없었다. 제주 여행과 게스트하우스 붐을 만들었다. 그 흔한 술집도 없던 탓에, 사람들은 기꺼이 15분을 걸어 술을 사왔다.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술잔을 부딪치고 여행 정보를 교류했다. 어둑한 마을에서 밤의 쫄깃쎈타는 등대와 같았다. 소등시간이 지나면 한잔이 아쉬운 이들은 협재 포구 맨바닥에 앉아 모자란 알코올을 채웠다. 파도와 바람은 이 술자리 최상의 ASMR이었다. 협재 바다는 낯선 이들을 친구로, 연인으로, 부부로 만들었다. 쫄깃쎈타는 그 숱한 인연의 교차로였다.


10년은 짧은 시간이었다. 황량한 바닷가 마을은 현란한 관광지가 됐다. 쫄깃쎈타의 상징과도 같았던, 거실 앞 통창 너머엔 비양도 대신 3층짜리 건물이 올라섰다. 풍경이 죽었다. 건물 외벽의 커다란 푸른 고래 그림은 바닷바람을 맞고 서서히 백경이 됐다. 홀로 제주를 다니던 이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더 이상 게스트하우스 여행을 할 수 없었다. 새 시대의 청춘들은 게스트하우스 대신 사생활이 보장되는 에어비앤비 숙소에 묵거나 밤새 술을 팔고 바비큐 파티를 여는 부킹형 게스트하우스를 택했다. 협재 상권이 활화산처럼 폭발할수록, 쫄깃쎈타의 공실률은 늘어갔다. 폐업을 결정했다. 개업할 때는 화려한 집들이를 했지만 마지막은 조용히 보냈다. 코로나19 여파였다. 책 수천권이 가득했던 노란 책장과, 여행자들이 남긴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 있던 오렌지색 벽이 텅 비었다. 10년간 누적된 세월의 흔적이 사라지고 없었다. 제주의 한 시대를 상징했던 공간의 퇴장치고는 쓸쓸했다. 이별은 원래 그렇다. 요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


공항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음원 서비스는 밥 딜런의 ‘포에버 영’을 틀어줬다. “당신은 별들까지 닿는 사다리를 짓겠지/ 그리고 모든 계단을 오를 거야/ 당신은 영원히 젊을 테지.” 가사랑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다만 절박했다. 바다도, 하늘도 무심히 푸르렀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noisep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