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길어 올린 삶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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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이권우의 책과 세상

고전에서 길어 올린 삶의 지혜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읽고 나면 당혹감이 든다. 신화를 읽는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이 서사시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다. 오디세우스가 10년에 걸쳐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신화의 얼개와 상당히 유사하다. 유혹을 떨쳐버리고 잇따른 위험을 지혜롭게 이겨내 마침내 귀환에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신화는 흔히 주인공이 과거보다 성숙해지고, 타인을 위한 희생을 통해 영웅으로 발돋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lt;오디세이아&gt;에서는 그런 면을 읽을 수 없다. 아내를 지키고 왕국을 되찾을 뿐이다. 뭔가 다른 독법이 필요하다.


고전학자 김헌은 <천년의 수업>에서 <오디세이아>를 인상 깊게 분석했다. 흔히 오디세우스의 방황이 10년이라 하지만, 8년 동안은 아이아이섬과 오귀기아섬에 머물면서 풍요와 환락의 삶을 누렸다. 특히 칼립스는 영원한 젊음과 건강, 그리고 아름다움을 주겠노라 유혹했다. 섬을 벗어나면 거칠고 넓은 바다를 항해하다 죽을 수도 있다고 겁박했다. 바닷길만 문제가 아니다. 고향에 돌아가면 아내와 왕국을 빼앗으려는 무리가 기다리고 있다. 그들과 목숨을 건 일대 결투를 벌여야 한다. 그런데도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오귀기아섬을 떠난다.


김헌은 이 대목이 “신이 아닌 인간의 삶을 선택”한 것을 뜻한다며, 불멸과 유희의 삶보다 죽음이 있는 삶이 더 가치 있다는 선언이라고 보았다. 상식의 전복이다. 무릇 인간은 영생을 꿈꾸는 법이지 않은가.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죽음을 긍정하는 길을 택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김헌은 말한다. “영원히 산다면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는 순간들은 빛을 잃을 것이니” 죽음이 있기에 비로소 삶의 가치를 또렷이 인식할 수 있는 법이라고 말이다.


<오디세이아>에서 흥미로운 대목 가운데 하나가 폴리페모스와 벌인 대결이다. 폴리페모스가 매일 저녁마다 한 사람씩 먹어치우겠다고 윽박지르며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묻는 장면이 있다. 그러자 오디세우스가 “나의 이름은 ‘아무도 안(nobody)’입니다”고 답변한다. 정말, 오디세우스답다. 그가 누군가. 트로이를 함락시킨 결정적인 전술을 제시한 지략가이지 않던가. 술에 취해 잠든 폴리페모스의 눈을 불에 달군 말뚝으로 찌르자 그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니, 다른 퀴클롭스들이 찾아와 누가 눈을 찌르느냐고 물었을 적에 “아무도 안이 그랬어!”라고 대답한다. 아무도 안 그랬다니, 동료들이 별일 아닌 줄 알고 돌아갈 수밖에. 다시 오디세우스가 얼마나 기발하고 재치 있고 약아빠진 전술가인지 확인한다.


김헌은 이 대목을 다르게 해석한다. 부하들이 폴리페모스에게 잡아먹히는데 오디세우스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절망감과 열패감이 엄습했다. 자신도 곧 잡아먹힐 판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디세우스는 자조적 감정에 휩싸였을 터다. 그래서 이름을 물었을 때 아무도 안이라고 대답했으리라는 풀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해석이라,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천년의 수업>이 독특한 것은 익히 알고 있는 고전을 새롭고 깊이 있게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철학적 열병을 앓을 적에 고민해봄직한 아홉 가지 주제의 질문에 답을 해주고 있다. 오디세우스가 인간의 삶을 선택했다는 해석은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라는 주제의 질문에 답을 준다. 인간은 종국에는 죽기 마련인지라 살아 있는 지금이 설혹 고통스러운 상황이더라도 가장 가치 있는 법이다. “인생은 유한하며, 그로 인해 삶의 순간들이 빛”나게 마련이다. ‘아무도 안’이라는 이름을 내뱉었던 장면은 “세상의 한 조각으로서 나는 무엇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준다. 누구나 무기력해지고 자괴심이 드는 절망의 순간이 있다. 아무도 아닌 존재라고 자조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는 정말 아무도 아닐까라고 되묻게 된다. 그럴 수는 없으니,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오기도 일고 용기도 부리게 마련이다. 시쳇말로 바닥을 치고 힘차게 솟아 올라오게 된다. “아무도 아닌 줄 알았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단합하면 큰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현대사에서 줄곧 확인하지 않던가.


기실 고전이야말로 지은이가 스스로 던진 근원적인 질문과 치열한 지적 고투 끝에 내린 답으로 이루어졌다. 오늘 우리가 던지는 질문에 고전이 응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전이라는 우물에 질문의 두레박을 던져보자. 삶의 갈증을 달래는 지혜의 냉수를 길어 올릴 터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lkw101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