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TV에선]오해영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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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TV에선]오해영의 투쟁

tvN 드라마 <또 오해영>의 오해영(‘그냥 오해영’)은 ‘대처’에 능하다. 결혼식이 하루 전날 취소된 이유에 대해 자꾸 묻는 동창회 친구들에게 “나, 남자가 너무 좋아. 한 남자랑 평생은 힘들 거 같아” 눙칠 줄 알고, 동명이인인 ‘예쁜 오해영’과 자신을 비교하는 남자들의 노골적인 언행에 대해서도 “미안하다. 나라서”라고 털털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사람들 앞에선 능청스럽고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변기에 앉아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릴 줄 안다. 그녀는 오랜 세월 외적인 조건으로 인간을 등급 매기고 그것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는 폭력적인 세상과 마주하며, 나름대로 자신을 지키는 법을 터득해온 베테랑 ‘흙수저’다.

이 드라마에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외모나 학벌, 집안의 경제력 등 세상의 폭력적 기준에 부합하려 애쓰거나 자격지심에 빠져 있는 못난 자신을 미워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고픈 정당한 갈망. 오해영은 학창 시절부터 죽 ‘예쁜 오해영’과의 비교열세로만 평가돼온 상처를 갖고 있지만, 한사코 ‘예쁜 오해영’이 되기를 거부한다. “만약에 내가 완전히 사라지고 걔가 된다면,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난 걔가 되기로 선택할까? 안 하겠더라고요. 난 내가 여전히 애틋하고 잘되길 바라요.”

<또 오해영>(tvN)



여기에 인간의 실존에 최초의 고유성을 부여하는 ‘이름’이 같다는 설정은 나를 지켜내기 위한 오해영의 투쟁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TV 앞의 여성들은 자기 일처럼 그녀를 응원한다. 남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부디 자신의 고유함을 지켜낼 수 있기를. 현실이 도무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을 때 응원은 더 절실해지는 법이다.

더구나 오해영은 로맨틱 코미디 여주인공 중 흔치 않은 ‘믿을 만한’ 여자다. 그녀는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 잘못돼 있는지 알 만큼 안다. 그녀는 말한다. “1급수에 사는 물고기와 3급수에 사는 물고기는 서로 만날 일이 없다. 1급수였던 예쁜 오해영은 1급수의 남자들만 만났고, 3급수였던 나는 3급수 남자를 만났다.” <또 오해영>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으레 삭제돼 있는 ‘급수 구분’의 불편한 진실을 전면에 내놓고 새로운 신뢰를 구축한 뒤, 익숙한 ‘사랑’ 이야기로 넘어간다.

도경(에릭)이 미래를 보는 설정은 ‘앞일 미리 생각하고 사랑하는 거 아니야’ 같은 말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은 먼저 안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며, 끝날 때가 되면 자연스레 소멸하는 것이다. <또 오해영>은 그런 사랑의 불가항력적인 속성을 주지하면서, “누구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 누구든 마음껏 사랑하는 것은 쪽팔린 일이 아니다”라는 ‘사랑 예찬’으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이 시대의 사랑이 ‘1급수는 1급수끼리, 3급수는 3급수끼리만’ 사랑하는, 흙과 금의 급수가 정해진 게임이 되어버렸다는 혐의가 깔려 있다. 오해영을 비롯해 편의점 알바생, 박수경(예지원) 등 여성인물들의 막무가내 사랑은, ‘밀당/썸’이란 단어로 축약되는 ‘사랑할 줄 모르는’ 시대에 저항하는 투쟁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이 드라마의 관심은 ‘그냥 오해영’이 ‘예쁜 오해영’을 물리치고 잘난 남자의 사랑을 차지하는 데 있지 않다. 그녀들이 이 거지 같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고 어떻게 지켜내는지, 그리고 그런 자신인 채로 누군가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지를 지켜보는 데 있다. 지금도 이 땅의 수많은 오해영들이 자신을 다독이며 야만의 세계와 싸우고 있을 것이므로.



이로사 |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