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여자가 서른두 살이 되면 미쳐도 곱게 미쳐라!” 영화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미자(예지원)는 백수나 다름없는 삼십대 비혼 여성이다. 난지도를 방불케 하는 방에서 허리가 아파 깰 때까지 늘어지게 자거나 만취가 일상인 그녀를 보다 못한 할머니 영옥(김영옥)은 베개 강스파이크와 함께 저런 일갈을 날린다.
그로부터 십년 뒤, 또 한 편의 ‘올드미스 다이어리’인 tvN 드라마 <또 오해영>에서도 서른두 살 비혼 여성 오해영(서현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툭하면 “술을 먹고 자빠”져 깁스 신세를 지고, 숙모의 주선으로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는 “내가 너를 일주일 안에 자빠뜨린다”는 말로 상대를 기함하게 만드는, 극중 표현처럼 부모조차 “감당 못할 미친년”이다.
캐릭터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은 우선 두 작품의 작가가 같아서이다. KBS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에 이어 극장판 대본에도 참여했던 박해영 작가가 <또 오해영>의 메인 각본가이다. 더 중요한 기시감의 원인은 따로 있다. 소위 ‘노처녀’를 둘러싼 사회적 편견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미자와 해영은 여전히 우리 시대 싱글녀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미친 짓’은 원래 그런 성격이라서가 아니다. 노처녀를 일탈적 존재로 치부하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 시선에 온 힘으로 대응한 결과일 뿐이다.
직장에서 작은 실수라도 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시집이나 가라”는 핀잔, 지분거리는 남자에게 오히려 먼저 ‘꼬리를 쳤다’는 선입견, 뻔뻔하게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지하철 ‘쩍벌남’의 야만스러움이 미자를 매일 취하게 만든다.
파혼의 아픔을 겪고도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조롱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황, 면전에서 대놓고 메신저로 그녀의 외모를 ‘씹는’ 소개팅남의 무례함이 해영을 ‘돌게’ 만든다. “왜 다들 나한테 함부로 해? 왜 나를 독하게 만들어? 왜 예의를 안 지켜!” 십년 전 영화 속 미자의 항변은 아직도 유효하다.
현실은 변함없지만, 달라진 지점도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대처 방식이 좀 더 과감해졌다.
tvN 드라마 <또 오해영>에 출연하는 배우 서현진
과거 미자의 분노는 잦은 상상신 안에서 해소되는 데 그쳤다. 그러나 해영은 훨씬 전투적으로 맞선다. 이는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선전포고’ 같은 화법에서 잘 드러난다. 매번 구박하는 상사에게 ‘맞짱’을 제안하는 것이나, 파혼에 대한 폭력적 관심에 “남자가 너무 좋아서 한 남자랑 평생은 힘들다”고 대응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뒤에서 혼자 울지언정 결코 쉽게 약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러한 특징은 해영의 상사 수경(예지원)에게서도 나타난다. 사십대 초반의 비혼 여성 수경은, 부양할 가족도, 애인도 없는 노처녀라는 이유로 야근 1순위에 오르곤 했던 미자가 십년 동안 일과 술독에만 빠진 결과 빚어졌을 법한 호전적인 캐릭터다.
“왜 캐릭터를 저렇게 잡았대? 못생겼어도 만만하게 보이지는 말자, 이런 거야?”라는 해영의 과장된 뒷담화는 사실 수경이 자신의 십년 뒤 모습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여전히 무례하고 불친절한 세상에서 더욱 독해져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이제는 그들도 잘 안다. 2000년대 ‘칙릿’의 전성기가 사그라든 뒤, tvN <막돼먹은 영애씨>가 유일하게 지켜왔던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계보를 다시 잇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또 오해영>의 등장이 반갑기만 하다
김선영 |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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