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TV에선]뉴스에는 없는 여성들의 ‘필리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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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TV에선]뉴스에는 없는 여성들의 ‘필리버스터’

이것은 한 장의 쪽지에서 시작되었다. 한 무고한 여성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비극의 현장에 누군가가 붙인 추모의 쪽지는 또 다른 이의 공감을 불러오고 그렇게 모인 작은 편지들은 곧 거대한 애도의 산을 이루었다. 글씨체는 달랐어도 적힌 내용은 유사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했던 폭력의 상처. 그래서 하나의 목소리이자 모든 여성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지난 17일 강남역 인근 상가 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의 충격은 여성들의 이례적인 집단적 추모 운동을 불러왔다. 이는 국내에선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살인사건 애도 운동인 데다 여성단체의 주도가 아닌 일반 여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퍼져나간 움직임이어서 특기할 만하다.

여성들이 거리로 나온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피의자 자신의 입으로 밝힌 명백한 ‘여성혐오 범죄’를 왜곡하거나 침묵하는 사회 분위기에 있다. 이 사건을 두고 오랜 역사를 지닌 여성혐오 문화의 극단을 보여주는 상징적 현상으로 인식하는 여성들과 달리, 남성중심적 사회는 피의자의 정신질환 병력을 근거 삼아 개인의 병리적 일탈로 축소해 바라본다.

이 사건을 다루는 주류 언론의 태도는 단적인 사례다.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고 집단추모가 시작된 18일, 이를 메인뉴스 헤드라인으로 다룬 지상파 방송사는 한 곳도 없었다. 폭염 소식만도 못한 뉴스거리였다. <SBS 8 뉴스>에서는 불볕더위 현상을 포함한 주요 뉴스를 다 마친 뒤에야 사회 분야의 한 꼭지로 1분42초간 이 사건을 다뤘다. 포커스는 ‘묻지마 살인’에 맞춰져 있었다. <KBS 뉴스 9> 역시 1분36초 분량의 단편적 보도에 그쳤다. ‘여성혐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인상적이나 ‘공용화장실이 불안하다’는 결론은 핵심을 멀리 비켜간 것이다. <MBC 뉴스데스크>는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지난 17일 새벽 인근 공용화장실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여성을 추모하는 글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_강윤중 기자



언론의 이러한 태도는 최악의 여성혐오 범죄 중 하나인 2004년 유영철 사건 보도 때와 달라진 점이 없다. 21명이나 되는 희생자 중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유영철도 “여자가 싫었다”고 발언한 이 명백한 혐오 범죄 역시 불우한 성장 배경, 가족 병력 등으로 인한 병리적 사건으로 치부됐다. 희생자들이 대표적 익명집단인 성매매업소 여성들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당시 한 언론이 ‘폐쇄적 원룸문화’의 위험성을 언급한 것은 ‘공용화장실’을 문제 삼는 현재와 다르지 않다.

결국 여성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여성혐오 사회에서 더 이상 억울한 피해자로 남을 수 없어 거리로 나온 것이다. 저 폭력의 현장을 추모와 저항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움직임이 포스트잇에서 출발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아니 애초에 공적 발화의 기회조차 억압당한 여성들이 일상에서 늘 겪어온 폭력의 고백을 담은 쪽지들은 어떤 측면에선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트라우마 증상인 파편적 말하기 방식을 닮았다.

하지만 그 위에 또 다른 여성들의 경험이 덧대어지고 겹쳐지면서 그것은 강력한 연대와 공감의 서사로 변해가고 있다. 그 성과는 결코 작지 않다. 당장 언론의 기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사건을 다룬 헤드라인에서 ‘강남 20대녀’라는 멸칭이 사라졌고, ‘여성혐오 범죄’임을 적시하는 언론도 늘어났다. 이제 여성들은 공적인 뉴스의 권위에 기대지 않는다. 스스로가 대안언론이 되어 세상을 움직이려 한다.



김선영 |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