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TV에선]‘딴청’의 공동체와 여성 예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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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TV에선]‘딴청’의 공동체와 여성 예능인

배우 이영진은 지난 9일 KBS <해피투게더3>에 출연해 “왜 이렇게 멀쩡한 분들이 시집을 안 가느냐”고 묻는 박명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혼 안 한 사람이 안 멀쩡한 건 아니잖아요.” 그녀의 말이 한국사회의 일반 기준과 ‘좀 다른’ 말일 수는 있다. 그러나 불편할 정도로 급진적인 말은 아니다. 그런데도 진행자들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다.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기껏해야 “지금 주먹 쥐셨다”며 웃을 뿐이다.

 

 

KBS <언니들의 슬램덩크>

 

왜 그들은 진지하게 이 말을 받아치지 않는가. 왜 오히려 박명수의 편견을 웃음거리로 삼지 못하나. ‘노잼’일까봐? 유재석, 전현무도 똑같이 편협해서? 아니다. 한국 예능에는 그런 식의 맥락이 아예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쇼비즈니스라는 TV의 특수성을 감안해도, 어떤 맥락은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한국 예능에서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견고한 한국 TV의 몰인권적 가치관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내는 태도. 그것은 언제나 ‘엉뚱녀’ ‘돌+I’ ‘센캐’(혹은 ‘욱여신’) 같은 말로 편의적으로 뭉뚱그려진 채 사라진다.

 

한국 TV는 그런 불구의 상태로 지낸 지 오래다. 한국 TV는 뚱뚱한 이에게 뚱뚱하다고, 예쁜 여자에게 애교 좀 부려보라고, 결혼 안 한 여성에게 왜 아직 결혼을 못했느냐고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좋은 학벌과 영어 잘하는 것에 껌뻑 죽고, 유럽은 동경하고 동남아는 무시하며, 장애인과 이주노동자 비하하고, 호모포비아를 자신감있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뉘앙스를 보이거나 물밑의 복잡한 사회문제의 끈을 잡아 그 끄트머리라도 수면 위로 끄집어내려는 사람의 말은, 편리한 맥락으로 옮겨 부드럽게 눌러 없애 버린다. 그게 한국 예능인이 응당 지녀야 할 덕목이다.

 

장동민은 두드러진 예일 뿐이다. 출연자와 제작진, 시청자를 포함해 한국 TV에 연루된 이들은 너나없이 이 기획에 동참하고 있다. TV가 사회의 편견을 고스란히 투사하고 강화된 편견이 다시 TV로 전이되는 악순환이라고만 말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한국 TV 전체가 기형적인 ‘딴청’의 공동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그중 상당수는 시청률 싸움에서, 독한 예능판에서 생존하려면 어쩔 수 없다며 어떤 쪽으로는 아예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이 ‘딴청’의 공동체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주체는 결국 여성 예능인일 것이다. 여성 예능을 표방하고 나와 지난주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한 KBS <언니들의 슬램덩크>를 볼 때마다 복잡한 감정이 된다. 한국 TV를 볼 때 거의 늘 밟게 되는 지뢰가 거기엔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거기에 ‘남자’가 없기 때문이다. 여자끼리의 프레임 안에서 그들은 춤대결을 해도, ‘섹시한’ 옷을 입어도, 남성의 시선으로 대상화되지 않는다. 김숙은 ‘가모장’일 필요가, 라미란은 ‘센 아줌마’를 연기할 필요가, 민효린은 애교를 전시할 필요가 없다. 여성 공동체 안에서 그들은 지금까지 봤던 것과 좀 다른 사람들이다. 단지 생물학적 여성을 모아놓았을 뿐인 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자매애 콘셉트에서 이런 해방감이라니. 그것은 거꾸로 내가 다른 예능을 보면서, 여성으로서 생각보다 큰 구속감을 느껴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언니들…>이 ‘걸그룹 되기’라는 확실한 꿈을 가지며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것을 ‘여성적 예능’의 청신호로 보기는 어렵다. 진짜 청신호는 이들 각자가 남성 중심의 다른 예능에 침투했을 때, 도로 변조되는 캐릭터와 위상을 경험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용기있는 여성 예능인이 많아지기를 염치없이 바란다.

 

<이로사 |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