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TV에선]‘성실한 염세주의자’ 이경규의 직장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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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TV에선]‘성실한 염세주의자’ 이경규의 직장생활

10여년 전 잠시 한국을 떠나 살던 시절, 문득 ‘아, 이경규 보고 싶다’고 생각한 기억이 있다. 애인도 엄마도 아니고, 이경규라니. 황당하지만, 이국의 낯선 침대 위에서 잠들며 나는 정말로 그가 그리웠다. 고향의 안온한 생활. 그 생활 속에 이경규라는 인물이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 이래 죽 TV 속에 있었다.

지난주 KBS <나를 돌아봐>(나돌) ‘경규, 명수 매니저 되다’ 편의 그를 보는 것은 그래서인지 머쓱한 일이었다. 그날의 그는 30여년간 보았던 어떤 이경규와도 달랐다. 그는 낡아 못 입게 된 옷을 벗고 영 어색한 새옷을 입으려 애쓰는 사람 같았다. 까마득한 후배 박명수의 시중을 드는 매니저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기는 했는데, 도저히 마음이 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방송이라지만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꾼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는 연신 안절부절못하고, 머리를 긁적이고, 손을 떨고, 답답해진 가슴께를 주먹으로 문질렀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왜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지 모르겠어. 여기 앉아 있는 게 이상해.” 그 자신은 어색했을지 모르나, 웃음은 예측불가한 것에서 가장 크게 터져나온다. 기획은 성공적이었다. 신구 ‘호통’의 대가들이 바뀐 위계로 만났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구도로 다가왔다.



SBS 예능 <아빠를 부탁해> 이경규 부녀_SBS 제공



생각해보면 변화는 예고돼 있었다. 얼마 전 종영한 <아빠를 부탁해>에서 그는 실제 딸과의 생활이라는 점에서 불가피하게 ‘츤데레’적 면모를 드러냈다. 지금까지 방송에서의 ‘호통’이 실은 상처받기 쉬운 약한 내면을 방어하기 위한 기제였다는 깨달음. 사람들은 그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이후 연말 연예대상에서 사회자로 나선 그는 일종의 ‘굴욕’을 감내해야만 했는데, <힐링캠프> 하차와 <아빠를 부탁해> <붕어빵> 종영 이후 맡고 있는 프로그램이 딱히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곧이어 방송된 <무한도전> 예능총회에서 그는 보란 듯이 프로그램을 종횡무진했다. 미친 웃음과 날카로운 예능판 분석으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 자리에서 밝힌, ‘MC에서 패널로’ 자신의 위치를 조정하겠다는 포부는 의미심장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등장한 것이 바로 <나돌>의 그다. 그는 본래 끊임없이 트렌드를 읽고 변화하는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갖추려 노력하며 생존해왔지만, 이번엔 달라지겠다는 의지가 전에 없이 선연했다. 그는 어디로 가려는 걸까. 이경규 개인에게 방송은 언제나 직장생활처럼 보였다. 영화라는 꿈을 가졌으나 방송을 더 잘하는 35년 근속 생활방송인. “나는 염세주의자”라고 말하며,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괴리를 가슴 한쪽에 담아둔 성실한 근속자. 그는 줄곧 늙어서도 현역으로 방송하겠다는 의지를 말해왔다. 환갑을 앞둔 그는 지금, 자신의 꿈으로 가는 발치에 최대한 길고 가느다란 길을 깔고 있는 것일까?

<나돌>에서 박명수는 낯선 역할에 머뭇거리는 이경규에게 “우리는 예능 머신 아니냐”고 호통친다. 이경규는 애처롭게 말한다. “나는 머신이 아니야. 강압적으로 하면 나는 못해. 준비할 시간을 줘.” 준비를 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이 프로그램이 그의 방송인생 제3막의 입구에 세워질 이정표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로사 |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