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누굴까? 덕선의 남편 말이다. 종영을 앞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여주인공 덕선(혜리)의 남편이 누구인가를 놓고 시청자들의 관심이 뜨겁다. 대체 이게 뭐라고 남편으로 정환(류준열)을 미는 팬들과 택(박보검)을 미는 팬들 사이에 날 선 입씨름이 오간다. 덕선의 남편 찾기가 너무 주목받은 나머지, 따뜻한 가족극은 어느새 실종되고 ‘응답하라 덕선 남편’이 되어버렸다는 질책도 들린다. 왜 제작진은 <응칠> <응사>에 이어 <응팔>까지 남편 찾기를 놓지 못하는 걸까? 식상함을 탈피하려면, 다음 시즌에는 과감하게 남주인공의 아내 찾기를 그려야 하지 않나? 응답 시리즈의 중심축이 지난날의 아련한 첫사랑인 한, 다음 시즌에도 남편 찾기는 반복될 것이다. 진화적으로 그렇다.
남성들이 포르노를 즐기는 데 귀중한 시간과 돈을 쓰는 걸 보면 여성들은 대개 혀를 끌끌 찬다. 진짜 여성도 아니고 모니터상의 시각적 자극에 흥분하다니 얼마나 딱한 노릇인가! 그런데 여성도 마찬가지다. 여성들도 할리퀸 문고나 로맨틱한 영화, 드라마에 속절없이 빠져든다. 쌍문여고 덕선이도 수업 시간에 공부는 안 하고 <장교와 프린세스> 같은 로맨스 소설을 읽다 재수했다. 왜 여성들은 실제 상황도 아닌 가상의 뻔한 연애담을 즐기는 데 귀중한 시간과 돈을 쓰는가?
먼저 우리가 어떤 것을 몽상하며 즐거움을 느끼게끔 진화했는지 살펴보자. 숨을 쉬거나, 길을 걷거나, 땀 흘리는 몽상을 하면서 은밀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주로 로또에 당첨되거나, 벼락출세하거나, 통쾌히 복수하거나, 간통하는 것을 몽상한다. 이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극히 낮지만, 만약 내게 일어난다면 크나큰 진화적 성공을 주는 사건이다. 즉 사람들이 종종 꿈꾸는 판타지는 만약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오면 그걸 어떻게 잘 붙들지 미리 대비하고 계획하는 기능을 한다(‘로또를 맞으면 여기저기 알려야 하나? 직장만 조용히 관둘까?’).
포르노와 로맨스, 남성과 여성이 기꺼이 돈을 내는 상업 에로물이 이토록 대조적인 까닭은 짝짓기 부문에서 엄청난 진화적 성공을 가져다주는 사건이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남성은 오늘 처음 본 젊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유리했다. 바로 포르노의 주된 내용이다. 반면에, 우리의 조상 여성들은 낯선 남성들과 성관계를 많이 한들 자식 수가 직접 늘어나진 않았다. 여성은 갓난아기가 어른이 되는 긴 세월 동안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능력이 있는 남성, 그리고 한눈팔지 않고 가족에게만 자원을 공급할 남성을 남편감으로 골라야 유리했다.
안타깝게도, 능력과 헌신을 다 갖춘 남성은 현실 세계에 거의 없다. 키 크고, 근육질이고, 자신만만해서 뭇 남성들을 누르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진짜 사나이’는 바람도 많이 피우고 자식들도 잘 돌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예컨대 세계적인 축구선수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여성 편력은 유명하다. 그래서 여성들은 일어날 확률은 희박해도 자신의 진화적 성공을 크게 높일 사건을 몽상한다. 바로 능력이 탁월하면서 결코 한 여자에게 매이지 않을 듯한 ‘나쁜 남자’가 어느 날 여주인공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여 영원한 헌신을 맹세하는 장면을 꿈꾸는 것이다. 물론 남편들은 드라마를 어깨너머로 보면서 “저렇게 잘난 남자가 평생 한 여자만 바라보며 산다니 말이 되나”라고 투덜댄다.
로맨스 장르의 줄거리는 일정하다.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만난다. 여주인공은 그의 유전적 자질, 자원 확보 능력, 자신에게 헌신할 의향, 아이를 좋아하는 정도, 성격 등을 까다롭게 평가한다. 대개 남주인공은 잘났지만 싸가지 없는 ‘나쁜 남자’(정환은 매사에 불만 많고 까칠하지만, 전교 1등이고 축구도 잘한다)다.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포로가 된다. 유능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여주인공에게는 친절하고 헌신적인 남자로 변모한다(정환은 비 오는 날 덕선에게 우산을 주면서 “일찍 다녀”라고 말한다). 남자가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고, 이후 둘은 행복하게 잘 산다.
응답 시리즈가 로맨스를 그리는 한, 다음 시즌도 남편 찾기일 수밖에 없다. 모든 로맨스 장르는 임신, 출산, 수유, 양육 등으로 남성보다 자식에게 투자를 더 많이 하기에 남성보다 훨씬 더 신중하게 결혼 상대자를 골라야 하는 여성의 성심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은 마치 사립 탐정처럼 놓치기 쉬운 사소한 단서들을 조합하여 남자가 과연 자신만 바라볼 유능한 신랑감인지 추리한다. <응팔>에서 정작 남편 추리의 당사자는 시청자가 아니라 덕선이인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로맨스 장르에서 남주인공은 외모, 성격, 배경 등이 상세히 묘사되는 반면 여주인공은 아주 간략하게 묘사된다. 여백을 많이 남겨 둠으로써 여성 시청자들이 여주인공과 자신을 쉽게 동일시하게 하려는 장치다. 그러니 종영이 코앞인데 덕선의 시선은 온데간데없다고 불평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전중환 |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진화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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