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분 금메달’은 여성 혐오 예능의 끝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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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분 금메달’은 여성 혐오 예능의 끝판왕

연기 경력 23년차의 톱스타 최지우에게는 아직도 신인 시절 출연했던 예능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1997년 인기리에 방영되던 KBS <서세원의 공포체험 돌아보지마>(이하 <돌아보지마>)에서 겁에 질려 통곡하던 장면이다. 그 당시 잘나가는 진행자였던 개그맨 서세원이 여성스타들을 으슥한 곳으로 초대해 그들이 공포에 떠는 모습을 웃음 재료로 삼았던 <돌아보지마>는 여성가학예능 유행을 본격화한 대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그로부터 20년 뒤, 같은 방송사의 설 특집 파일럿 예능으로 방영된 <본분 금메달>은 이 사회가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이 과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다. 가짜 귀신에 경악하는 여배우의 무방비한 표정을 클로즈업하던 <돌아보지마>의 화면과 가짜 바퀴벌레에 기겁하는 여자아이돌의 소위 ‘굴욕’ 표정을 반복 재생하는 <본분 금메달> 속 장면에선 시차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아진 것이라곤 ‘굴욕 표정’을 더욱 ‘디테일하게’ 담아내는 촬영 기술뿐이다. 개선은커녕, 가학의 방식은 더 집요하고 뻔뻔해졌다.

<본분 금메달>의 기획의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본분에 충실해야 하는 연예인 집단의 진솔한 속내를 들여다보는’ 방송이다. 여자아이돌이 출연한 첫 회의 경우 “언제 어디서든 예뻐야 하는” 본분에 얼마나 충실한가를 검증하는 내용이 펼쳐졌다. 이 검증은 사전에 예고되지 않은 “무허가테스트”를 통해 이뤄진다. 예컨대 정식검증종목처럼 진행된 상식퀴즈가 실상은 급작스러운 바퀴벌레 모형 투입에도 예쁜 표정을 얼마나 유지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테스트였다는 식이다.


레이디액션



“진솔한 속내”를 내보일수록 오히려 불리한 게임일뿐더러, 여자아이돌의 “본분”이라 주장하는 내용부터가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하다. 네 차례의 테스트가 내세운 이들의 “본분”은 언제나 예뻐야 하고, 상대방을 격려하는 리액션을 취해야 하며,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도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이다. 이는 여성연예인을 떠나 모든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덕목과도 일치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지난해 대중문화계를 지배한 ‘여혐’ 논란에 불을 지핀 개그맨 장동민이 싫어하는 여성의 특징으로 꼽았던, 이른바 “설치고, 생각하고, 떠들고, 말하는 여자들”의 정반대편에 이 “본분”이 있다.

이를 검증하는 방식이 ‘몰래카메라’라는 점도 불편하다. 몰래카메라라는 형식은 근본적으로 여성을 향한 가장 폭력적인 시선을 압축하고 있다. 지난해 ‘여혐’에 반대하여 일어난 페미니스트 운동이 제일 먼저 몰래카메라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몰래카메라는 사실상 ‘몰래’가 아니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는 늘 남성이었으며, 애초에 여성들의 허락은 개입할 여지조차 없다. <본분 금메달>에서 상식을 검증한다며 여자아이돌의 ‘백치미’를 예찬하는 ‘허가테스트’가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무허가테스트’의 폭력이랑 다르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KBS는 지난해 <레이디액션>이라는 여성예능을 파일럿으로 선보인 적 있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배우 여섯이 대표적인 남성중심 장르인 액션영화에 도전하는 과정을 담은 이 방송은 멸종해가는 여성예능의 새 가능성을 보여주며 호평받았지만 끝내 정규 안착에 실패했다. 그로부터 1년 뒤 등장한 방송이 여혐예능의 끝판왕이라는 점이 몹시도 씁쓸하다.

김선영 |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