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이 끝났다. 일부 ‘응팔’ 팬들 사이에선 “응팔을 차라리 시트콤으로 만들라”는 원성이 쏟아졌다. 드라마라고 하기엔 회당 주제에 구성을 억지로 끼워맞추거나, 뒤로 갈수록 우연에 기대어 인과가 부서진 서사가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덕선의 남편으로 유력하게 점쳐지던 정환(류준열)의 막판 ‘캐릭터 붕괴’에 충격을 받은 팬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응팔’은 실제로 에피소드 중심의 20~30분짜리 시트콤으로 만들어도 재미있을 법하다. 애초 예능 PD 출신이 만든 데다, 시트콤이 으레 그렇듯 캐릭터가 두드러진 드라마다.
거기다 한국 방송계에선 드물게 세 번째 시즌까지 성공시킨 브랜드가 되었으니, 형식을 바꾸어 개중 한 캐릭터 중심의 스핀오프를 제작한달지 하는 식의 변화를 꾀해도 좋을 것이다.
‘응팔’을 시트콤으로 만들면 어떨까 상상해보다가, 그 많던 시트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졌다. 지난 2013년 김병욱 감독의 <감자별 2013QR3>(tvN)를 매일의 낙으로 삼고 살 때도 ‘왜 이 나라에 시트콤은 이것뿐인가’ 생각했던 것 같은데, 알고 보니 그게 멸종동물의 마지막 개체였다. 그 뒤로 시트콤은 공중파는 물론이고 종편, 케이블 채널에서조차 자취 없이 소멸해버렸다.
이대로라면 한국 시트콤은 미래 백과사전 어딘가에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유행하고 TV에서 사라진 방송 장르’ 정도로 기술될지 모른다. 한국에서 시트콤이 안되는 이유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제작 여건이다. 시트콤의 특성상 다른 드라마에 비해 제작비는 적게 책정되는데 방송은 매일 해야 하니 노동 강도는 세고, 작품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시트콤 전문 PD나 작가풀이 적은 것도 문제다.
<하이킥> 시리즈의 김병욱 감독은 2010년 한 인터뷰에서 “조금만 성공하면 다들 드라마로 가니까 좋은 대본 쓸 작가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한때라도 한국에서 시트콤이라는 장르가 정착되었다기보다는 ‘시트콤에 개인적 열정을 쏟은 몇몇 걸출한 PD와 작가들이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한지도 모른다.
최근 <응답하라> 시리즈나 <초인시대> <고교처세왕> 등 이른바 ‘예능형 드라마’가 시트콤의 진화 버전이라는 기사들이 간간히 나오는데, 예능 요소가 있다고 다 시트콤으로 뭉뚱그릴 순 없다.
시트콤에서 웃음만큼 중요한 건 ‘일상의 반복’이다. 매회 같은 장소에 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 그 가운데 사소하고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벌어진다는 점. 매일의 에피소드는 독립적이지만 다음날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그런 프랙탈의 형태로 느슨하게 이어진 세계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거기다 일상의 희극적 재현은 그 자체로 시사성을 띤다. 장기간 방송되는 믿을 만한 시트콤은 그래서, 바깥의 다른 차원에서 언제라도 이 세계를 깨부술 수 있는, 크리스털로 된 투명한 평행우주를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얼마 전 세계 최대 유료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가 한국에 상륙했다. 넷플릭스 TV 콘텐츠의 대세는 휘발성 강한 리얼리티쇼보다 대본과 연속성이 있는 드라마, 그중에서도 코미디 시트콤이다. 국내 시트콤 제작에 자극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로사 | 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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