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사건이 왜 엿 같은 줄 알아? 범인이 누군지, 동기가 뭔지, 모든 게 밝혀진 사건은 힘들어도 가슴에라도 묻을 수 있지만, 미제사건은 내 가족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니까 잊을 수가 없는 거야. 하루하루가 지옥 같지.”
장기 미제사건을 다루는 tvN 수사드라마 <시그널>에서 형사 차수현(김혜수)이 들려준 첫 회의 한 대사는 이 작품의 동기를 정확히 알려준다. 어떤 사건에서 범인을 찾아 단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희생자와 피해자를 위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시그널>은 냉철한 수사드라마인 동시에 인간의 상처에 공감하는 휴먼드라마임을 선언한다. 이는 첫 사건에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난다. 과거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김윤정 어린이 유괴살인사건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15년 만에 진범을 찾는 과정의 숨 막히는 긴장감과 함께 그동안 매일같이 경찰서 앞을 지켜왔던 유족의 애타는 절규와 피로한 얼굴을 집요하게 비춘다. 이 사건을 통해 공소시효 폐지 문제를 강하게 제기한 것도 같은 이유다. 피해자의 고통에는 유효기간을 따로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우 김혜수가 출연하는 tvN 드라마 <시그널> 포스터_경향DB
휴먼수사극으로서 <시그널>의 이 같은 특징은 극본을 맡은 김은희 작가의 전작들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되어 온 공통점이다. 한국형 수사물의 대가로서 그의 명성을 드높인 SBS <싸인>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법의학수사물이면서, 또한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위한 애도의 드라마이기도 했다. 극 중에서 부검은 “단순히 사인만을 밝히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행위이자 “죽은 자의 유언을 들어주는” 엄숙한 의식처럼 그려졌다.
후속작인 SBS <유령>과 <쓰리데이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이버수사극 <유령>은 차가운 사이버 세계 안에서 익명 뒤에 숨은 악플러처럼 타인에 대한 공감력을 상실해가는 우리 사회를 풍자했고, 청와대경호실을 배경으로 한 수사극 <쓰리데이즈>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하는 경호원들의 건조한 표정 뒤에 거대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복수와 한풀이를 숨겨 놓았다. <싸인>에서부터 <쓰리데이즈>에 이르기까지, 주인공들이 희생자의 유해 앞에서 애도하는 장면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김은희 작가 수사극의 궁극적 목적은 그처럼 늘 범인 찾기의 쾌감 이전에 피해자들의 상처에 대한 사회적 공감을 향해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시그널>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김윤정 유괴사건은 진범을 붙잡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며 윤정을 마음에 둔 친구로서 끝까지 진실을 밝혀내고자 했던 박해영 경위(이제훈)가 윤정이를 마지막으로 본 장소에 국화꽃을 헌화하며 마무리된다. 그 자리에 환상처럼 나타난 어린 윤정은 성인이 된 해영을 바라보며 비로소 밝게 웃는다.
<시그널>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대화를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판타지적 설정을 빌려온 이유도 여기에서 드러난다. 갈수록 사회적 공감능력이 마비되어가고 아픈 역사에 대해 점점 빨리 망각해가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비극을 잊지 않는 소수가 만들어낸 기적일지도 모른다. <시그널>은 이 공감력 상실의 시대에 보내는 간절한 기도처럼 보인다.
김선영 |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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