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열렸던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11월27일 폐막됐다. 순위가 무슨 대수겠냐만서도 어쨌든 대한민국은 종합 2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중국은 아시안게임 1위를 당연시하고 있고, 한국은 일본을 멀리 떨구고 2위 자리를 지키는 것이 마치 상수인 양 여기고 있다. 2002년 축구 월드컵이후로 한국은 본선 진출에 1승 이상은 기본, 행여나 16강 진입을 못하면 큰 사태가 나는 것같은 분위기이니 뭐 그리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그래서일까, 이상하게도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는 뚜렷이 기억나는 '명승부'라든가 국민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이벤트가 없다.
물론, 박태환이 금메달을 여럿 목에 걸었고, 남녀 양궁이 아슬아슬한 경기를 펼치며 맹주 자리를 지켰다. 아 그래, 이른바 얼짱에 4차원녀로 주가를 올린 여자 평영 200미터 금메달리스트 정다래 선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올초만 해도 각 방송사들이 단독중계 문제로 피를 튀기며 싸웠던 동계올림픽이 있었고 김연아 선수의 이미지는 모든 미디어에 걸쳐 폭발적으로 재생산됐다.
그렇다면 김연아가 없어선가? 혹은 2008년 하계 올림픽 때 이미 장미란과 박태환의 세계 정상을 경험해선가? 여러 스포츠 이벤트에 걸쳐 각종의 일급 성취와 감동을 겪어서 국민들이나 미디어 모두 무뎌진 건가? 축구 월드컵 결승쯤에 올라야, 펠프스만큼의 다관왕이 나와야 눈물 한 번 진하게 흘려볼 수준에 와 있는 건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인간의 감동과 호들갑에는 일종의 역치라는 게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스포츠 스토리는 미디어 스펙터클의 속성을 갖고 있고, 하나의 의사사건(pseudo-event)으로서 목적의식적으로 재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의 아시안게임을 다소 김빠진 이벤트로 넘어가게 만든 여러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G20과 연평도 사태라는 더 '센 놈'의 존재였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G20은 대단히 전형적인 의사사건이다. 모든 일정이 사전에 정해져 있고 모든 성과도 이미 본 행사와 거의 무관하게 틀지어져 있다. 미디어에 의해 무대에서 적절히 상연되지 않으면 국민 대중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사건이다.
이에 반해 연평도 사태는 우연적인 요소가 많이 작동하기 때문에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는 행위자와 무대를 관장하는 미디어의 목적의식성이 가장 덜하다.
아시안게임은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 속성을 갖고 있고, 실제로도 시기 상 그 중간에 발생했다.
정부는 G20이 성공적인 이벤트로 주목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감동과 성취를 이끌어낼만한 질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수많은 미디어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이 과정에서 이 번 아시안게임은 기존의 동급 미디어 이벤트보다도 못한 지위로 격하됐다. 개막 한참 전부터 감동의 스토리를 예비하고, 관심을 모으고, 적절한 드라마성을 준비했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시간도, 의지도, 미디어 아웃렛도 부족했다.
또 그나마 약간 달아오르는 듯도 했던 시기에 연평도 사태가 터졌다. 미디어가 카메라만 갖다 대도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사건이니, 그렇지 않아도 예열이 덜 돼 있던 아시안게임이 묻혀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여기서 G20과 아시안게임, 그리고 연평도 사태를 잇는 어떤 음모론 같은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미디어 이벤트들로 가리고 싶었을 법한 이슈가 퍽 많았던 건 사실이라고 해도, 그럴 목적으로 이 모든 의사사건을 매끄러이 구성할 만큼 능력있는 집권세력이라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연평도 사태 때문에 아시안게임이 묻혀버렸다고 불평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는 연평도에서 죽어간 생명들과 앞으로 전개될 사건들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고 아프다.
다만 이와 같은 사건의 연쇄가 단순히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되는 것은 아니며, 그 각각의 '주목가치' 역시 자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G20과 같은 이벤트를 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원이 무리하게 동원되었을지, 그 과정에서 애당초 배분되었어야 할 곳에 배분되지 못한 자원은 무엇일지, 그 결과는 또 무얼지, 누누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평도 사태가 단지 미디어 스펙터클만은 아니라고 한다면, 쉽게 피의 복수나 전쟁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전쟁이 현실의 사건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올 때, 그것은 단순히 CNN 속의 이라크전처럼 '재현'되는 것이 아니며, 게임 스크린처럼 '미션 클리어'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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