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2세에 대한 선입견이라고 하면 우선 오만방자하고, 부모의 재력만 믿고 노력하지 않으며, 무능력하다. 이 같은 선입견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 TV드라마다.
유독 신데렐라 스토리에 열광해 온 드라마들은 오만방자한 재벌 2세가 가난하지만 착한 여주인공을 만나 성실하게 변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4), <별은 내 가슴에>(1997) 등이 전형적인 예로 꼽힌다.
왼쪽 _ MBC <역전의 여왕>의 박시후. 오른쪽 _ KBS2 <매리는 외박 중>의 김재욱.
그런데 요즘 TV 속 재벌 2세는 당당하고, 부모의 재력에 힘입어 일찍이 해외 유학으로 높은 학력을 자랑하며, 천재적인 경영 감각까지 지녔다. 재벌이라는 사실을 숨기기보다는 자신의 장점 중에 하나로 내세운다.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했다. 승자 독식이다.
◀ SBS <시크릿 가든>의 현빈.
전형적인 예가 SBS <시크릿 가든>의 현빈(김주원 역)이다. 드라마 속 현빈은 물려받은 재산이, 또 앞으로 물려받아야 할 재산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의 재벌가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31세에 외조부로부터 백화점을 물려받은 CEO다. 인터뷰 한번으로 미국 명문대에 입학, 최우수 졸업생의 영예까지 안았다.
사업 수완도 타고나서 ‘VVIP’(초우량고객)를 겨냥한 전략으로 업계 1위를 차지했다. 사촌 관계인 한류가수 오스카(윤상현)와 백화점 모델 재계약을 할 때조차 그의 약점을 이용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천재 사업가. 재벌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한다.
자신을 무시하는 스턴트우먼 라임(하지원)에게 “나는 ‘내가 저런 몸과 엘리베이터를 타다니 경거망동했구나’라고 반성한 그런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트레이닝복 차림이라고 무시하는 라임에게 등판에 붙어 있는 상표를 보여주려고 애쓴다. 다친 라임을 병원까지 데려다 주면서도 “너에게 관심 있어서가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적 책임을 지기 위한 선행”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MBC 드라마 <역전의 여왕>의 박시후(구용식 역)도 마찬가지다. 극중 군대시절 구용식은 “이건희 아들은 재용이 형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우리집도 재계 20위 안에 든다. 병역비리 때문에 사회 분위기가 안 좋아 현역으로 왔다”고 대놓고 말했다.
매사에 열심인 김남주(황태희 역)를 만나 ‘갑’과 ‘을’에 대해 알고, 약자인 ‘을’을 도와주려는 고운 성품까지 지녔다. 도망치려는 황태희에게 “그러니 평생 을이지. 자기가 노력하고 잘해서 차지한 자리까지 박차고 도망가면서 누구보고 억울하대?”라고 설득해 황태희를 직장에 복귀시킨다.
KBS2 드라마 <매리는 외박 중>의 김재욱(정인 역)은 한인 재력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건방진 사고뭉치가 아니라 여유로움이 배어 있는 도련님이다. 재력과 매너를 갖춰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높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착한 아들이기도 하다. 동시에 음악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는 능력 있는 사업가.
한때 드라마 속 재벌 2세들은 비열한 방법으로 사업에 성공하고 여자도 배반하는 나쁜 남자와, 하고 싶은 건 따로 있으나 아버지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하고 방황하는 착한 남자로 나뉘었다. 이에 비해 요즘 드라마 속 재벌 2세들은 확실히 진일보한 완벽남들이다.
드라마가 사회상을 반영했다고 하면 개념 있고 능력 많은 재벌 2세들이 많아져 즐거운 현실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을 잡기 위해 이상(理想)을 현실처럼 그린 거라면 또 다른 선입견을 만들지 않을까.
<박은경 스포츠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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