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현장에서 피는 ‘연대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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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이권우의 책과 세상

재난 현장에서 피는 ‘연대의 꽃’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콧등이 시큰해지며 울컥해진다. 얼마 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코로나19로 피해를 본 대구 주민을 위해 써달라며 119만원을 기부했다는 보도를 접하며 감동했다. 대구지역에서 확진자 숫자가 급증하자 광주에서 감염병 전담병원의 병상 중 절반을 대구 경증환자를 치료하는 데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두 지역의 골 깊은 지역감정과 그것이 빚은 역사적 참극을 생각하면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경희대 학생 세 명이 뜻을 모아 코로나19와 싸우는 의료진을 돕자는 취지로 학내 커뮤니티에서 모금활동을 펼쳤는데, 일주일 만에 4600만원 정도 모았다고 한다. 애초 목표는 50만원. 뜻이 갸륵한 데다 말만 앞세우는 어른보다 낫다 싶었다.


전쟁은 예상할 수 있다. 설혹 선전포고 없이 일어나더라도 조짐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연이 일으키는 재난은 과학의 레이더를 벗어나기 일쑤다. 한번 일어나면 경악과 충격, 그리고 속수무책이라는 수식어로만 겨우 상황묘사가 가능하다. 놀라운 것은 이런 재난의 잿더미에서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적인 행동이 꽃핀다는 사실이다. 9·11 참사 당시 세계무역센터 안에 있던 대략 2만5000명은 서로 도우며 질서정연하게 대피해 피해를 줄였다. 재난 현장에는 공학기술자, 건설노동자, 의료요원, 용접기술자 같은 전문가가 자진하여 모여들었다. 강가에 고립된 사람을 구하려고 너도나도 배를 몰고 와 준 덕에 어림잡아 30만명이 대피할 수 있었다. 미담은 워낙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죽음의 냄새가 자욱한 지옥에서 천국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랑과 연대의 향연을 만난 셈이다.


재난 현장에 섬광처럼 나타난 놀라운 이타적 장면을 포착해 그 의미를 탐색한 책이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이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2005년 뉴올리언스 허리케인에 이르는 다섯 건의 대재앙을 톺아보고 있다. 지은이는 대재앙의 현장에서 벌어진 이타적 행위만을 과장해 설명하지 않는다. 일단, 재난 그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지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재난의 현장엔 기회주의적 행동도 있고,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 빈민과 소수자와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 약탈과 경제범죄에 대한 강박관념, 치명적인 무력에 기대려는 마음, 헛소문에 기초한 행동”인 엘리트 패닉이 종종 일어난다는 점을 인정한다.


지은이는 재난을 막 겪고 난 이를 만나서 들은 회고담을 소상히 밝혔다. 우리는 흔히 그가 공황상태에 놓여 있거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예상은 빗나갔다. 모든 게 엉망이 돼버린 날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웃이 모두 집 밖으로 나와 서로 대화를 나누며 도와주고, 즉석에서 급식소를 세우고 노인을 보살폈단다. 그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도 서로를 보며 행복감을 느꼈죠”라고 말했다. 재난 때문에 “평소의 구분과 양식이 모두 파괴되면, 대다수 사람들은 형제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리고 그런 목적의식과 유대감은 혼란과 두려움, 상실과 죽음 속에서도 기쁨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폐허의 한복판에서 “공적 삶과 시민사회에 대한 열망”이 솟아오르고, “깊은 만족감과 새로운 사회적 유대, 자유”를 누리며, “공동체적이고, 융통성 있고, 상상력이 풍부한” 삶을 보이고, “아비규환 속에서 기적을, 슬픔 속에서 기쁨을,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주는” 역설적 상황을 지은이는 재난 유토피아라 이름 짓는다. 물론 이 유토피아는 오래가지 않는다. “끔찍한 순간에 아주 짧게 등장”한다. 하지만, 이 엄청난 순간을 두고 우리가 고민할 바는 수두룩하다. 인간 본성론으로 좁혀 보더라도 새로운 통찰이 가능하다. 가장 최악의 순간에 설핏 드러나는 것이 진정한 본성 아니겠는가. 재난이라는 번개가 치니 잠시 드러난 인간 본성은 제임스가 말한 시민기질, 그러니까 사회참여가 의무가 아니라 하나의 취향이자 지향이라는 말이나, “한마디로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며, 인간을 사회에서 벗어나게 하기는 불가능하다”는 토머스 페인의 언명과 일치한다.


고통스럽고 답답한 재난의 시절을 보내며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자. 재난에 빠져 있을 적에야 비로소 짧게 “상호부조와 이타주의의 천국이 나타나는지가 아니라, 왜 평소에는 그런 천국이 다른 세계의 질서에 묻혀버리는가”라고. 그 답을 찾다보면, 지은이의 말대로 지옥의 문턱에서 연대와 사랑의 공동체로 열린 뒷문을 찾아낼지도 모를 일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