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에서 균형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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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이권우의 책과 세상

극단에서 균형의 시대로

눈이 번쩍 띄었다. 제목이 심상찮았다. <중용>을 <일상사에 초점 맞추기(Focusing the familiar affairs of the day)>라 번역했다. 당연히 우리 학자는 아니다. 오랜 관행을 깨고 이미 그 뜻을 짐작하는 제목을 굳이 풀어낼 리 없다. 서구의 동양철학자라 가능한 일이다. 중용을 이처럼 번역하는 근거가 궁금해 책을 뒤적여보았다. 로저 에임스와 데이비드 홀은 먼저 중용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는지 밝히고, 주요 용어를 영어로 그렇게 옮긴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나서 중용 본문을 옮기고 주석을 달고, 맨 끝에 중용 텍스트 분석을 실었다. 본디 고전은 이런 식으로 옮겨야 마땅하다. 독자는 이 과정을 따라가면서 옮긴이의 독창적 해석에 매료되고 새로운 번역을 지렛대로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게 마련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두 저자는 고대동양의 사유를 과정지향적 세계관이라 분석했다. 서구는 정지와 영원을 선호한다. 동양은 연속성, 생성, 전이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이 관점을 바탕으로 하나의 용어를 맥락에 따라 여러 단어로 옮기는, 일종의 언어 클러스트를 구성했다. 예를 들면 중(中)의 번역어는 초점(focus), 초점 맞추기(focusing), 균형(equilibrium), 중심(center), 불편부당(impartiality)으로 언어 클러스트를 이루었다. 파격은 성(誠)의 번역어이다. 기존의 번역어와 같이 성실(sincerity), 정직(integrity)을 쓰기도 하지만 대체로 창조성(creativity)이라 옮겼다.


저자는 성을 창조성이라 번역한 이유를 소상히 밝혔다. 동양철학을 과정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표리부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sincerity와 건강한 전체라는 의미의 integrity는 건실하게 되어가는 혹은 전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반드시 포괄해야 한다. 전체가 되어 가는 심미적 역동성이야말로 창조과정이 의미하는 것”이란다. “우주적 창조성의 지속적 과정에 인간의 참여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이라는 말에 수긍이 갔다.


신정근은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에서 성을 완전한 진실이라 보고 26장을 “완전한 진실은 멈추는 적이 없다. 멈추지 않으면 오래 가게 되고, 오래 가면 효과가 나타나고, 효과가 나타나면 여유 있고 오래 가고, 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면 넓고 두터워지고, 공간적으로 무한히 쌓이게 되면 고상하고 지혜롭게 된다”라고 옮겼다. 벽안의 저자는 이 대목을 “극진한 창조적 과정은 끊이지 않는다. 끊임이 없으니 지속한다. 지속하니 효과가 있다. 효과가 있으니 멀리까지 미친다. 멀리까지 미치게 되니 넓고 두텁다. 넓고 두꺼워 높고 빛난다. 높고 빛남은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게 한다. 멀리까지 미치게 되니 모든 사건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라고 옮겼다. 과연 적절한지 논쟁이 일어날 법하지만, 관점이 뚜렷한 번역이 주는 신선함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영어권에서 <중용>은 제임스 레그 이래 줄곧 <The Doctrine of the Mean>이라 옮겼다. 여기서 Mean은 평균값, 중간값을 뜻하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느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족과 과잉이라는 두 극단 사이의 평균값에 자리한 덕성을 중용이라 하니, 예를 들자면 용기는 비겁과 만용 사이의 중용이 된다. 이에 비해 지은이는 용(庸)을 일러 정현이 말한 중도의 실천적 적용에서 ‘초점 맞추기’를, 주희가 말한 일상적이고 보통인 것에서 ‘일상사’를 착안해 <일상사에 초점 맞추기>라 제목을 옮겼다. 특히 familiar는 같은 어근의 family를 떠올리게 해 유가의 핵심인 가족의 가치를 확인해준다. 


동양고전을 영어로 옮긴 작업의 결과가 흥미로워 책을 읽다가 나중에는 오늘 우리에게 중용이 왜 중요한지 새삼 곱씹어 보게 되었다. 중용의 저자나 집필시기는 늘 논란이 되나, 대체로 전국시대의 작품으로 본다. 전쟁이 일상이 된, 극단의 시대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한 책이 바로 중용이다. 승자독식의 시대를 넘어 세대 간 불평등문제가 심각해지고 때아니게 이념으로 편을 갈라 싸우기 바쁘다. 우리가 사는 오늘이 바로 또 다른 전국시대다. 이제, 균형의 시대로 넘어가려면 중용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신정근은 모순의 공존과 현실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태도라 했다. 비록 칼날 위를 걸을 수는 있어도 중용의 길은 가기 어렵다 했으나, 우리 사회가 더 늦기 전에 이 길로 접어들기를 소망해본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