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흔히 말하듯, 지도자란 타인을 돕기 위해 안전지대를 벗어난 사람이다.” 죽음을 앞두고 쓴, 성공한 한 과학자의 파란만장한 자서전에서 만난 인상 깊은 구절이다. 이 한마디에 지은이 바레스의 삶이 오롯이 응축되어 있었다. 가난했다. 끼니를 거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버지는 일보다 친구와 도박을 하거나 카드 게임하는 걸 더 즐겼다. 어머니는 4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어머니한테서 공부머리를 물려받아 학업성적은 늘 우수했다. 아버지는 중독성향을 물려주었으나, 도박이 아니라 ‘과학과 연구’에 대한 중독이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특징을 일러 연구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강한 열정과 인내와 끈기, 그리고 회복력과 탄력성이라 했다. 갖은 난관을 이겨내고 MIT에 들어갔다. 당시 MIT 전체 학생 가운데 여학생은 5%에 불과했다.
여자여서 차별받는 느낌은 왕왕 있었으나 대학 2학년 때 결정적인 일을 겪었다. 이 무렵 인공지능에 매료되어 관련 수업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한 수업에서 교수가 아주 어려운 기말숙제를 내주었다. 오로지 바레스만 풀어왔다. 교수의 반응이 충격이었다. 누구도 이 문제를 풀어오지 못한지라 성적에 반영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를 찾아가 항의하자 돌아온 답이 ‘걸작’이었다. 남자친구가 대신 풀어준 거 아니냐는 것. 연구자로 활동하면서 받았던 차별 사례도 자서전 곳곳에 드러나 있다.
MIT를 졸업한 바레스는 신경과 의사 겸 신경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다트머스 의학대학원을 거쳐 하버드 의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연구분야는 신경아교세포와 신경계 질환의 연관관계다. 이 분야에서 이룬 업적은 자서전 2장인 ‘과학’에 소상히 밝혀져 있으나,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이라 이른바 ‘과알못’이라면 건너뛰어도 괜찮다. 박사후연구원 경력까지 치면 바레스는 무려 17년이나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도 스탠퍼드대 교수가 되고 나서 5년 동안 엄청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소장 과학자의 도전적인 문제의식을 기성세대가 받아주지 않아 연구비를 받지 못했다. 학교를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정도였다. 국립 연구소의 사무관 두 명이 눈여겨보아 바레스가 이 분야의 정점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바레스는 개인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을 되밟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과감히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2005년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총장이 성차별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자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을 ‘네이처’에 실어 파문을 일으켰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해 과학연구기관의 성차별을 해소하는 데 일조했다. 젊은 과학자가 연구비로 고민하지 않게 하려고 전 재산을 자신이 있던 학과에 기부했다.
임용된 지 4년 만에 종신직 교수가 되던 해였다. 지역신문에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한 트랜스젠더이자 트랜스젠더 권리 운동가인 제이미슨 그린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기사를 읽으며 매우 많은 공통점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서너살쯤부터 겉은 여자이지만 속은 남자라 느꼈다. 이란성 쌍둥이인 여동생과 비교하면 금세 알 수 있었다. 성장기에 성별 혼란으로 “지속적인 괴로움, 낮은 자존감, 강한 자살충동”을 겪었다. 성년이 되어 유명한 과학자가 되고 나서도 그 이유를 몰랐다. 심지어 이 기사에서 처음으로 트랜스젠더라는 낱말을 보았을 정도다.
바레스는 두려웠다. 성전환을 하는 순간 그동안 쌓은 공든 탑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잖은가. 마침내 결심했다. 성전환을 하겠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동료 과학자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 읽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저는 진심으로 저 자신이 좋은 과학자이자 좋은 선생이라고 느낍니다. 비록 성별은 달라지더라도 여러분 모두가 아시다시피 제가 가장 사랑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라고 썼다. 마침내 바버라 바레스는 벤 바레스가 되었다. 자서전 제목이 <어느 트랜스젠더 과학자의 자서전>인 까닭이다. 커밍아웃 이후 그는 젊은 성소수자 과학자의 길라잡이가 되었다. 또, 안전지대를 벗어난 것이다.
모퉁이 돌이 주춧돌이 된 ‘성공신화’는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 주춧돌 위에 무엇을 세웠는지는 평가되지 않는다. 바레스는 동료 과학자 낸시 홉킨스의 말대로, 선의의 탑을 세웠다. 그는 진정으로 우리가 닮아야 할 지도자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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