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작고한 여러 문인들 중 최인훈 선생은 내게 특별한 울림을 갖게 한 분이다. 최인훈 문학에 대해 자기만의 것이라고 느끼는 그런 울림을 간직한 독자들이 적지 않으리라 짐작하는데, 그 ‘자기만’의 이유도 아마 사람마다 제각각일 것이다. 내게 그것은 1960년 4월에서 기원한다.
아직 시골티를 벗지 못한 채 가정교사로 근근이 숙식을 해결하던 대학 초년생에게 소설 <광장>은 개안(開眼)의 광명을 주었다. 한때 ‘사상계’와 어깨를 겨루던 잡지 ‘새벽’에 “600매 전재”라는 광고와 함께 작품이 발표된 것도 흥분되었지만, 첫 페이지 오른쪽 네모칸 안에 실린 다음과 같은 유명한 ‘작가의 말’이야말로 4·19혁명의 역사성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물론 어느 경우에나 언어가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변화하는 현실을 언어로 설명하고 변화된 현실에 개념을 부여함으로써 현실은 구체적인 실체를 갖게 된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1960년 11월은 시인 김수영에게는 이미 혁명의 변질과 후퇴를 나타내는 기호로 작용했지만 작가 최인훈에게는 아직 언론자유의 소설적 구현 가능성이 남아 있는 시점을 뜻했다. 이 상반된 대응에는 의용군과 포로수용소의 어둠을 뚫고 간신히 살아남은 중년시인과 분단현실 최초의 증언자로 등장한 야심적인 청년작가, 이 양자 간의 경험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때 당연히 김수영보다 최인훈의 감각에 공명했다. 하지만 모든 독서체험이 그렇듯 <광장>의 독자들도 그 소설에서 한 가지만 얻는 것이 아닐뿐더러 읽을 때마다 똑같은 것을 얻는 것도 아니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체제를 모두 비판함으로써 분단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경향신문 2018·7·23)라는 식의 언술이 <광장>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자주 되풀이되는 평가이자 부인할 수 없는 ‘공식적’ 평가라고도 해야겠지만, 60년 가까운 동안 200쇄 이상 팔리는 까닭에는 그와 같은 이념소설로서의 측면 이외에 성장소설 내지 청춘소설로서의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도정에서의 고뇌와 좌절은 젊음이 겪는 영원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최인훈에 심취하여 그때까지의 그의 작품을 모조리 찾아 읽고 그 독후감을 ‘에고의 자기점화(自己點火), ―최인훈론’이라는 평론으로 작성하여 1964년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갓 등단한 평론가로서 최인훈 선생의 집을 찾아간 것은 그해 초봄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주소를 알았는지 기억에 없지만, 그는 청파동 오르막길을 좀 오르다가 약간 꺾어진 비탈에 있는 작고 낡은 집에 살고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보이지 않고 최인훈만 마당에 내다놓은 나무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전망은 그럴듯했다. 그가 나를 방으로 안내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내내 마당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6년의 통역장교 끝에 지난해 제대했다지만 바짝 마른 체구의 그에게서는 조금도 군인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는 가끔씩 엷은 미소를 지어가며 말을 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다 잊었으나, 말을 받아쓰면 그대로 문장이 될 듯한 문어체로 말하는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 후에도 그는 언제나 그런 투로 말했는데, 그것은 내가 듣기에는 소설문장에서 사용된 자신의 언어를 거의 그대로 입으로 옮겨 발화한 것이었다.
이후 가끔 그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됐다. 둘만 만나기도 했고 여럿이 함께 만나기도 했다. 당시 그는 같은 ‘자유문학’ 출신의 안수길 선생 제자인 소설가 남정현·박용숙과 3인방이란 별칭을 들어가며 노상 어울렸는데, 나는 그들의 아지트인 광화문 월계다방으로 찾아가곤 했다. 하지만 나는 차츰 문학의 사회적 책임과 그에 상응하는 예술적 형상화에 주목하면서 조심스럽지만 최인훈 문학의 관념적 성향에 대해 비판적인 뉘앙스의 언설을 펴기도 했다. 1966년 가을 어느 날, 현암사에서 발행하던 계간지 ‘한국문학’의 청탁으로 염상섭의 장편소설 <삼대>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분석한 ‘식민지적 변모와 그 한계’라는 제목의 평론을 써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다방에 앉아 내 원고를 읽고 난 그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슬픔이랄까 체념이랄까, 간단한 압축적 표현을 거부하는 떫은 표정이 얼굴에 나타났는데, 그 표정의 깊은 뿌리를 나는 수십년이 지난 뒤 장편 <화두>를 읽고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그 후부터 그를 만나는 일이 점점 뜸해졌다. 아마 마지막 만난 것은 월간지 ‘세대’의 창간 10주년 기념 신인문학상 심사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찾아보니 1973년 4월28일인데, 몇 달 뒤 그는 미국 아이오와대학 세계작가프로그램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떠났고 그 후 오랫동안 소설창작의 붓을 놓았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던 올해 4월 말경 나는 누군가로부터 최인훈 선생이 중병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치 45년 만에 처음 생사를 알게 된 듯한 충격이 왔다. 수소문해서 당장 찾아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를 대면하자면 못 읽은 작품들을 통독해야 자격이 생길 것 같은 압박이 느껴졌다. 새로 조판한 ‘최인훈 전집’ 가운데서 <화두>를 펼쳐 들었다. 드문드문 밑줄이 그어져 있는 걸로 보아 예전에 읽은 듯도 했으나, 성치 않은 시력에 의지해 겨우겨우 다시 읽는 일은 완전히 새로운 독서였다.
젊은 시절부터 나는 최인훈의 작품 가운데 중편 ‘가면고’와 ‘구운몽’을 유난히 좋아했다. 작가의 내면세계에 대한 치열한 자기분석, 근본적 변혁을 열망하는 숨은 의지와 그 앞에 가로놓인 불가피한 환멸, 그리고 한국소설사에서 찾기 힘든 대담한 형식실험 등의 뛰어난 결합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화두>를 읽고 나자 최인훈의 모든 문학적 시도와 사상적 모색은 이 장편소설에 집약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분단시대 최고의 걸작 중 하나를 우리 문학사의 단상에 헌정한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가 분단극복의 첫걸음을 딛는 것을 목격하는 기쁨 속에 세상을 떠난 것은 그나마 우리에게 위안이다.
<염무웅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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