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에 인연을 맺은 선배가 있다. 그는 내가 일하던 회사의 협력사 책임자였다. 업무로 맺어진 인연은 거리를 두는 편이라 예외없이 일에 대해서만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함께 야근을 해야 할 사건이 터졌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나온다는 인쇄물 초고를 함께 확인해야 하는 상황. 우리는 충무로에 위치한 인쇄소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의 업무와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관심이 꽂히는 대목이 나오더라. 그가 주말마다 중편소설을 창작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무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안락사를 소재로 한 그의 소설은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소설 쓰는 광고회사 과장이라. 다음주까지 이어진 만남은 한국 신인문학상 제도에 관한 담론으로 확장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선배가 무려 100회가 넘는 퇴고를 했다는 것이다. 퇴고란 글쓰기에서 ‘문장을 가다듬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퇴고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초고의 완성이 글쓰기의 시작이라면 퇴고는 절반 이상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문제는 고치거나 삭제할 문장이나 문단을 찾기가 쉽지 않은 퇴고의 특징에 있다. 당시 선배의 꿈은 전업소설가였다.
<파인딩 포레스터>는 글쓰기와 우정에 관한 영화다. 은둔작가 J D 샐린저가 떠오르는 윌리엄 포레스터(숀 코너리)는 글쓰기를 배우는 자말 월레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초고는 마음으로, 퇴고는 머리로 써야 한다”고. 퇴고의 방법을 깨달은 자말 월레스는 발군의 창작능력을 발휘한다. 실패가 두려워 폐쇄적인 삶을 택했던 노작가는 손자뻘의 친구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퇴고한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어떤가. 그는 출판사에 제출한 자신의 소설을 자비로 수정할 만큼 퇴고에 정성을 쏟았다. 퇴고과정에서 중요한 대목은 분량을 늘리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과감하게 줄이는 과정을 반복했다. 사실주의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발자크식 글쓰기의 핵심은 퇴고에 있었다. 퇴고의 달인이라면 이외수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인터뷰에서 장편소설을 무려 60회 넘게 퇴고했다고 소회한다.
바둑에서는 퇴고가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쉽지 않다. 상대방의 양해하에 잘못 둔 수를 다시 놓는 방법이 있기는 하나 프로기전에서는 불가능하다. 대신 복기라 불리는 방식이 존재한다. 승부를 마친 바둑을 다시 두는 행위를 말하는데 퇴고라기보다 복습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 일수불퇴라는 바둑용어는 글쓰기처럼 퇴고가 존재하지 않는 바둑세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국가정책에 퇴고를 대입해보면 어떨까. 이는 글쓰기와 바둑의 중간 위치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 국가정책이란 국민이 공감하거나 거부하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다. 퇴고를 가벼이 여긴다면 국민의 눈높이에 상응할 만한 정책의 유지와 추진이 불가능하다. 당연히 퇴고는 세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권력의 정점에서 만든 정책인들 완벽할 수는 없다. 이 완벽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부족한 정책을 중단하거나 고치는 과정이 퇴고에 해당한다. 여기에 거대담론이나 세부계획 모두 예외일 수 없다. 성장이라면 몸부터 사리는 안이한 정치관행도 개선해야 한다. 성장의 수혜자가 중요하지 성장담론 자체가 분배를 가로막는 암초는 아니다.
퇴고란 자신의 글을 직접 수술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삭제해버린 글이 눈에 아른거릴 수 있다. 고쳐야 할 문장이 쉬이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악마는 퇴고과정에서 발견하는 정책의 패착이다. 악마는 퇴고에 있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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