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민 전 관장이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뒤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공모가 한창일 때의 일이다. 담당자의 얘기였는데 후보로 올라온 이들을 둘러싼 엄청난 양의 투서가 오고 가서 무척 곤혹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후보로 올라온 국내 인사들을 모두 물린 자리에 갑자기 외국인 관장이 선정되었다. 그렇게 관장이 된 스페인 출신의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이 결국 계약 연장을 받아내지 못하고 올해를 끝으로 물러난다.
그만큼 관장직도 정치적 입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마리 관장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일 것이다. 외국인이기에 한국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과 경험의 한계가 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인맥에서 자유로운 만큼 파벌로 얼룩진 한국 미술계에서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보여줬다는 인식이 있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이 국제적 교차로이자 광장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미술관의 활성화에 기여한 점을 높이 사는 이들도 있다. 하여간 마리 관장은 2019년 라인업도 미리 발표했지만 결국 물러나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관장이 올해 안에 뽑힐 것이다. 신임 관장 공모에는 총 13명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최근 서류심사를 통해 후보자는 5명으로 압축됐다고 한다. 이변이 없다면 이 중 한 명이 향후 3년 임기 동안 국립현대미술관장직을 수행할 것이다. 그런데 명단을 본 나로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진정한 변화는 요원하겠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모름지기 관장의 조건이라면 현장 경험이 풍부하면서 작품을 보는 날카롭고 정확한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해관계에서, 인맥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관한 깊고 넓은 안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이 조건에 얼마나 부합하는지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관장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미술작품을 보는 안목, 좋은 작품을 분별해내는 능력이다. 그래야 좋은 기획전시, 의미 있는 전시가 가능할 것이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의 가장 큰 문제는 동시대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잡아내고, 중요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조망을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의미 있는 기획전시와 엄정한 안목으로 걸러낸 좋은 작품의 전시, 이와 연동해서 한국 미술에 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담론을 발전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이것이 국제적 담론 속에서 논의되도록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제대로 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는 학예연구원들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지만 결국 이를 통솔하는 관장의 안목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기존 제도를 보면 관장이 큐레이터 인사, 전시 기획, 소장품 구입에 일절 관여할 수 없도록 하는 등 관장의 권한과 역할을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관장에게 권한을 주어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공모제와 임기제로 관장을 선출하는 것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또한 해당 분야의 최고 적임자를 선정하고 차관급으로 그 지위를 격상해주어야 한다. 임기제이기에 3년을 마치면 당연히 그만두어야 하는 것도 큰 문제다. 3년 동안에 전임자가 계획한 것을 시행하고 마무리하다보면 임기가 끝나버리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도대체 그 시간 동안 무슨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까?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도 지난 10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짧은 임기’와 ‘제한된 인사권’이 업무 수행에 큰 제한을 줬다고 말한 바가 있다. 더구나 문화체육관광부는 학예사와 학예실장을 채용하고 임명하는 권한도 주지 않는 등 관장이 당연히 지녀야 할 인사권과 예산권을 빼앗고 있다. 더구나 학예사 대부분을 무기계약직으로 채워놓고 있다. 이런 판에 이들이 무슨 전문성을 내세우고 책임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미술관을 옥죄는 지금의 법과 제도가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관장만 바꾸면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그러니 진정한 의미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바뀌려면 지금의 이 공모제와 인사권, 예산권 등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관장 선임에 앞서는 시급한 문제인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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