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한 끗 차이’를 만드는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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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직설]‘한 끗 차이’를 만드는 페미니즘

여성혐오를 예술로 포장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는 것 같다. 안티페미니스트 레토릭을 읊조리다 공연이 중단되고 말았다는 래퍼 산이의 ‘웃기고도 슬픈 에피소드’는 이를 잘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이제는 창작의 원천으로 페미니즘 인식론을 참고할 때다.

 

강의 중에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페미니즘적인 캐릭터를 만들 수 있나요?” 나는 100점짜리 페미니스트 캐릭터의 전형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캐릭터와 이야기, 영상언어 등을 진부하지 않게 구성하고 조합해내는 페미니스트 상상력이 중요하다.

 

예컨대 나는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이하 <라온마>)가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꽤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라온마>는 2018년 서울을 살던 형사 한태주(정경호 분)가 우연한 계기로 1988년 인성시에 떨어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간다.

 

배우 정경호가 출연한 OCN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의 한 장면

 

 

이 작품은 <응답하라 1988> <살인의 추억>과 함께 1980년대를 회고하는 대중서사로 주목할 만했다. 다만 <라온마>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페미니스트 관점을 넣으면서 1980년대를 조금 다르게 그려낸다.

 

<응답하라 1988>이 나왔을 때, 어떤 시청자들은 “그리운 1980년대 마을공동체”를 보여준다며 반가워했다. 하지만 어떤 여성들은 “그 공동체는 옆집 아저씨가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집에 들어와 낮잠 자고 있던 내 다리를 만지던 공동체였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그리워했던 ‘어머니 따듯한 밥 지으시고, 아버지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며, 온 마을이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란 기실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통용되는 야만의 시공간이기도 했다.

 

<라온마>는 1980년대를 폭력과 무질서의 시대로 다루고, 동시에 2018년의 인간과 1988년의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차를 통해 그 힘이 명백하게 젠더화되어 있었음을 폭로한다. 2018년의 인간인 한태주에게 스토킹 범죄는 “성폭력”이지만, 1988년을 쭉 살아온 남형사들에게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이다. 혹은 한태주에게 함께 일하는 여성 동료는 “윤순경”(고아성 분)이지만, 다른 형사들에게는 “미스윤”인 것이다.

 

<라온마>는 이런 사소해 보이는 디테일을 살리면서 지난 30년간 여성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진보운동이 만들어온 한국 사회 인식의 변화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어떤 이는 “도대체 한국 페미니즘이 한 것이 뭐가 있냐?”라고 질문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페미니즘은 적어도 무엇이 폭력인지 밝히고 또 그와 싸워왔다. “당신과 함께 일하는 여성동료는 그저 커피 타는 미스 윤”이 아님을 말해왔음은 물론이다. 그런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2018년은 “농담 한마디 편하게 할 수 없는 지옥”이 되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겨우 만들어낸 변화 가능성의 시대가 된다.

 

1980년대를 “강간의 왕국”이자 지옥으로 포착하는 대표적인 작품은 <살인의 추억>일 것이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에서 여자는 그저 누군가의 애인이거나 딸, 피해자일 뿐이고, 남형사의 정의감에 불을 지피기 위해 시체가 되어 사라지는 ‘각성의 매개’일 뿐이었다.

 

<살인의 추억>에서 대상의 자리에 머물렀던 여성은 <라온마>에 와서야 드디어, 그를 끊임없이 무의미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는 여성 경찰, 자신의 피해 사실을 진술하는 피해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몸과 머리를 쓰는 얼굴 있는 존재가 된다.

 

<라온마>가 페미니스트 작품의 교본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여전히 아버지의 상실을 극복하고 어른으로 성장해야 하는 남성 청년이고, 유일한 여자 주인공의 주요 행동 동기는 그 영웅에 대한 사랑이다. 하지만 <라온마>가 지금·여기를 사로잡고 있는 관습적인 상상력과 타협하고 교섭하면서 다른 진부한 남성 드라마들과 달리 ‘한 끗 차이’를 만들어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한 끗 차이는 역시 페미니스트 상상력 덕분에 가능했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