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의 톺아보기]예능 전성시대에 살아가기,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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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성석제의 톺아보기]예능 전성시대에 살아가기, 살아남기

올 초 어느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들었던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말씀이 한 달이 지나도록 뇌리를 감돌고 있다.

“20년 전, 나는 언젠가 음식과 요리가 예능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문학이 언젠가 예능이, 그것도 대단히 고급스럽고 존중받는 예능이 될 것이라고 말해둔다. 왜 그렇게 될 것인지는 묻지 말라.”

문학의 좁은 길을 평생토록 순례자처럼 걸어가야 하는 후학들을 격려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었으리라. 평소에 남다른 혜안을 가졌다고 느껴온 분이라 선생의 예언이 언젠가 실현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때는 이야기도 시도 예능이었다. 춤, 판소리, 살판, 활쏘기, 심지어 검투사끼리 치고받고 찔러 죽이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조차 예능이었다. 중국 주나라 때의 육예(六藝 : 예절, 음악, 말을 모는 기술, 글씨 쓰기, 수학)가 교양인의 덕성을 함양하는 방법론이었다고는 하지만 일단 여섯 가지 재능을 남에게 펼쳐 보여주고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예능의 본질에 닿아 있다 하겠다.

누가 먼저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바둑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육예에 바둑이 포함되어 있다는 게 거의 상식에 가까웠고 바둑을 포함하는 육예는 구경의 즐거움과 승부의 짜릿함마저 보여주는, 오늘날의 프로 스포츠와 예도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골치 아프고 까다롭고 어려운 게 아니었다. 즐겁게 하는 것이었다. 육예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 것과 상관없이 바둑 또한 한때는 국민 대다수의 예능이었다. 조훈현, 조치훈, 이창호 같은 프로기사가 타이틀을 따내는 과정을 텔레비전 생중계로 보고 기적적인 승리에 환호하고 그들이 오색 종이조각이 휘날리는 가운데 카퍼레이드를 할 때 연도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열렬히 박수를 쳤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예능에는 시도 바둑도, 심지어 문학 가운데서 가장 대중적인 호응을 받았던 소설도 들어가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 기호를 만족시키기에 문학은 생산체계와 소비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예전에는 예능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가령 판소리의 소리꾼이며 시조창을 하는 기생, 패관소설류를 공급하던 책쾌도 오늘날의 예능과는 외계인만큼이나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딱딱하거나 심오하거나 전통적이거나 정통적인 것을 주장해서는 예능이 될 수 없다.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프로듀스101’에 참여한 연습생들_경향DB



손에 잡히지 않는 정신세계나 내면, 진실과 진리를 다루는 것은 예능이 되지 않는다. 학문은 예능이 되지 못한다. 국민 대다수에게 한때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었던 것들, 공부나 교과서, 시험, 세금 같은 건 아예 자격이 없다. 리모컨이나 스마트폰을 쥐고 소파에 누워 있던 소비자를 일어나 앉게 하는 각성의 기예는 예능이 될 수 없다. 질문이 많고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따지고 미래와 현재와 과거를 통찰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예능이 아니다.

전문적인 숙수들이 만들고 왕후장상과 귀족들이나 누리던 요리가 대중 모두가 즐거워하고 공감하는 예능이 될 수 있었던 데는 바로 그 전문인들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요리사 가운데 예능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예능과 요리를 접목시켰기 때문에 요리가 예능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 몸에 관한 지식과 의학을 예능에 접목시킬 수 있는 전문가, 예컨대 예능에 잘 맞는 의사가 있으면 그것도 얼마든지 예능이 될 수 있다. 역사, 여행, 농사, 정신분석, 독신생활, 동네 축구, 신경학, 생물학… 뭐든 예능이 된다. 그것을 예능과 접목시킬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 연암 박지원이 무슨 글을 쓸 때마다 그 글을 베껴가려고 너도나도 종이를 사는 바람에 육의전 종이값이 폭등했다는데 박지원이 예능인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날의 예능이 지금까지 역사상에 명멸했던 예능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예능 생산자들은 예능 소비자들이 하나 힘들이지 않고 그것을 즐기게 해준다는 것이다. 박지원의 산문을 예능으로 향유하려면 필사하고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고 느끼다 마침내 ‘밥알을 벌처럼 뿜어내며’ 즐거워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지금은 가장 편한 자세로 앉거나 누워서 누군가의 훼방이나 간섭 없이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즐기기만 하면 된다. 손끝만 까딱거리면서. 그러면 뇌는 쉰다. 혈류량 역시 줄어들며 잠이 들었을 때의 뇌파 비슷한 것을 보여준다. 정신의 근육 역시 움직일 필요가 없다. 화면 속의 예능인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전문성을 보여주고 희로애락을 버무려서 공감을 자아내며 우리를 쉬게 해주고 웃게 해준다. 시간은 흘러가고 일용할 위안을 받은 사람들은 다시 방문을 열고 일을 하러 간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 앞으로도 누군가 계속 예능을 만들어야 하는데 거기에 필요한 자원은, 그것이 물적 자원이든 정신적 자원이든 인적 자원이든 언젠가 고갈이 된다는 것이다. 일정한 수준 이상의 자극에 익숙해진 대중은 재미없고 전문적이고 심오한 것에는 눈도 돌리지 않을 것이다. 수동적으로 예능인들이 먹여주는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유동식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받아만 먹던 사람들은 딱딱하고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논법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씹을 수도 없고 소화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 어떤 분야든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몸과 정신의 힘을 다해 일하고 단련하고 해당 분야 최고의 기예, 기술,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요즘 요리 예능으로 성가를 날리고 있는 누구는 몇 달이고 양파를 깎으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팔뚝에는 수많은 흉터가 남아 있을 것이며 손가락은 몇 번이고 봉합수술을 했을 것이다.

이들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재능을 소비만 하던 사람들 가운데 누가 그들을 대신해 생산자가 될 것인가. 모두가 소비만 할 뿐 어려운 과정을 밟아 뒤를 이을 사람이 없어질 때 각광받던 한 분야가 다른 분야의 예능으로 바뀌고 사람이 교체되고 또 포맷이 바뀌고…. 그러다 보면 문학에도 언젠가는 그 순서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굶어죽거나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성석제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