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응팔’ 현상의 함의와 곱씹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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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비평]‘응팔’ 현상의 함의와 곱씹을 것들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이 숱한 화제를 낳고 방영을 마쳤다. 쌍문동 골목에서 오손도손 서로에게 의지하며 꿈을 키워가던 5인방의 다채로운 사연과 성장담, 지금은 찾기 어려운 동네사람들이 나누던 온기와 훈훈한 유대감은 많은 이야깃거리와 애잔한 추억의 소환을 매개하기도 했다.

<응팔>은 전작들이 성취한 성공적인 공식을 활용하면서, 재현의 축을 가족과 공동체로 풀어낸 수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먹거리를 수시로 나누고, 서로의 처소를 자기 집 드나들 듯 누비며,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얼굴 맞대고 풀어가는 이 봉황당 골목 사람들이 엮어내는 풍경은 향수 어린 밥상공동체와 우애의 장소성을 감각적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응팔>의 따뜻한 정경을 보며 성인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기억 일부를 되새김질할 수 있었고, 청년층은 시간의 힘이 몰라보게 변화시킨 생경한 지난날의 모습을 상상하는 재미와 더불어 청춘의 번민과 관련된 공감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 ‘코믹가족극’은 치밀하게 구현된 설정이 주는 깨알 같은 재미를 제시하면서, 선이 굵은 주제의식이나 서사를 끌어가는 결정적인 갈등이 없었음에도 창의적이고 ‘착한’ 텍스트가 성취할 수 있는 만만치 않은 흡인력과 여운을 선사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기념비적인 해를 기점으로 고도성장의 현실, 대중문화가 확장되던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과정을 재구성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제는 허구의 드라마 속에서나 접할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의 거룩함’을, 또한 대중이 절감하는 ‘정서적 허기’를 위안하는 대중문화의 부드럽지만 강한 역량을 감지하게 해준다.

동시에 대중문화가 당대의 욕망과 ‘정치적 무의식’을 반영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드라마가 성취한 반향과 호소력을 복합적으로 탐구하는 비판적 해독도 가능해 보인다. 일견 매우 상세한 복고와 고증의 코드를 활용하며,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효과적으로 매개했던 이 작품 속 세밀한 시대 분위기와 장소성의 재현은 기실 1980년대 후반에도 이미 스러져가던 ‘문화적 상상’의 의도된 투사이자, 적지 않게 인공적인 설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응팔>이 구현한 과거라는 상징공간의 면모는 일종의 문화적 가상성과 ‘보철기억’의 효과라고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 드라마가 따뜻하게 풀어내는 쌍문동 골목의 정경은 1980년대 말이면 웬만한 근대화된 도시공간에서도 접하기 쉽지 않았던 가상적인 설정이라 할 것이다. 한편 꿈꾸는 듯한 눈매의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천재 바둑기사 택이를 챙기는 쌍문동의 아이들은, 반지하방에 살아도, 공부를 못해도 구김살이 없고, 흔한 투정도 부리지 않으며, 고단한 입시교육의 치열한 압박도 크게 느끼지 않는다. 시위에 참여하고 민정당 연수원에도 들어갔던 동네가 배출한 수재인 보라는 어머니의 눈물 어린 애원 앞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운동’을 접기도 한다.

이 드라마가 의도적으로 주목하지 않은 과거의 엄혹했던 사회상은, ‘좋았던 옛 시절’의 선택적인 재현 속에서 희미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중요한 사회적 갈등의 단면들이 휘발되기도 한다. 이는 대중의 욕망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각자도생’의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피곤한 사회적 주체들을 위로하는 복고콘텐츠를 기획한 ‘기억산업’ 내 생산자들의 복안으로도 판단된다. 그런 측면에서 종영을 접하면서 문득 쌍문동 아이들의 ‘후일담’이, 2016년의 그들은 어떤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스토리라인으로 유추하면, 강북의 소박한 동네 출신들인 아이들은 ‘비범하게’ 자라 사회·경제적으로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겠지만, 덕선의 아빠 동일처럼 명예퇴직의 대상이 될까봐 위기감을 느끼고, 사회구조의 문제는 비켜가며 개인의 책임과 자기관리를 근엄하게 되묻는 작금의 사회상 속에서 번민하고 있는 40대 중반의 ‘흔들리는 주체’들이 되지는 않았을까.

양극화된 사회·경제적인 현실과 내면을 파고드는 불안 속에서 대중은 자신들의 억눌림과 정서적인 허기를 달래주는 콘텐츠에 열광한다. 동시에 과거 한 시절 ‘사람다운 삶’이 있었음에 응답하라는 감상적인 제언은 현재로 향하지 못하고, 안온하고 착한 가상의 과거라는 유토피아로 향하면서, 향수와 판타지의 정경 속으로 수용자를 초빙한다. 이런 측면을 단순히 퇴행이라고만 간주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웠다는 과거를 둘러싼 문화적 재현이 현실에서 내몰리는 삶을 가리는 정서적 알리바이는 아닌지의 숙고 또한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기형 |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