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출판은 사회를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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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산책자]출판은 사회를 관찰한다

이 모임, 정확히는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출판 콘퍼런스를 마치고 나면 주위에 공유하고 싶어서 몸살 날 지경이다. 1년에 두 번, 동아시아 5개국 6개 지역, 한·중·일·대만·홍콩·오키나와가 돌아가며 주최한 지 벌써 13년째인데, 매번 각 나라 출판인의 사례와 고민을 공유하며 배우는 게 많다.

 

2주 전에는 한국이 주최국이 되어 부천에서 ‘시대 상황과 출판’이란 주제로 콘퍼런스를 열었다.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축하 연주로 시작한 회의장에는 출판의 어려움은 만국 공통이라는 정서가 깔려 있었지만 많은 독자와 만나 사회를 변화시킨 성공적인 사례를 들으며 다시 뭉클해지곤 했다.

 

인상적인 순간은 홍콩의 70년 된 출판사 ‘삼련서점’의 리안 편집장의 발표였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다’라는 발표문은 독서 인구가 줄고 있지만, 출판은 여전히 그 깊이와 폭, 체계성, 시대에 발맞추어가며 강력한 전파력을 갖는다는 선언적인 문장으로 시작했다. “책 한 권 한 권이 하나의 선언이다. 책은 우리의 태도를 대변하고 그 한 권 한 권이 모여 출판사의 얼굴이 되고 영역이 된다”라는 것. 그래서 책은 운동 차원에서 출간되어야 하고 책이 힘껏 소리치게 해야 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대중 교육의 추진력을 가져야 한다고 강변했다.

 

리안 편집장은 <나는 안락사를 원한다>라는 책으로 사지가 마비된 환자가 사회 구성원으로 존재하지 못할 때 진짜 사망 선고를 받는 것과 같은 현실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사생활이 전혀 없고 사소한 생존 활동도 타인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을. 저자인 청년 덩샤오빈은 대학 졸업식 공연 리허설 도중 사고로 전신이 마비되고 침대에 누워만 있는 신세가 되자, 당시 행정장관에게 ‘존엄사’를 희망한다는 간절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일이 널리 알려지자 돕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후 저자는 머리에 부착된 젓가락으로 자판을 쳐서 원고를 완성했다. 글도 좋았지만 이 책은 사회적 반향이 컸다. 이후 힘을 얻은 저자는 사회적 낙오자를 인터뷰해서 <누구나 실패하고 산다>라는 두 번째 책을 냈다. 각계각층 반응은 더 커졌다. 전신마비 공익단체를 위한 책 <길목>의 제작비가 기금으로 모이기도 했다.

 

또한 유명 디자이너인 덩다쯔의 <별만이 동행하는 여행>을 편집하면서 동성애자의 권리를 사회적으로 ‘외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동성애자 권리찾기 운동을 시작했고 출판사는 같은 주제의 <동성애자 가장> <세상은 이미 변했다> 등 출간 작업을 이어갔다.

 

홍콩의 사회적 약자로 꼽히는 가사도우미의 책 출간도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졌다. 홍콩에는 33만 명가량의 외부인이 가사도우미로 존재한다. 그들 대부분은 가정은 있지만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 고용주의 집으로 이사해야 하는 상황. 법적으로 그들은 반드시 고용주와 함께 거주해야 하고 계약 만기 후 2주 내에 새 일자리를 못 구하면 홍콩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숨죽이며 여러 가지 악조건을 감내하고 있다고 한다. 한 언론인이 가사도우미의 사례를 현장 취재하여 출간한 <가사도우미, 우리 집에 있는 낯선 사람>은 그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이후 가사도우미의 법적인 상태나 노동 조건 등에 대한 토론회와 사진전시회 등이 열리기도 했다. 삼련서점은 더 나아가 외부인 노동자를 이해하기 위한 다문화 현상을 학교와 대중의 시야로 끌어들이고자 기획을 이어나가고 있다. 몸이 불편한 사람, 불치병 환자, 저소득층, 소외된 성소수자들, 매춘, 할례, 교육받지 못하는 아동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심층적으로 탐사하고 그 생생한 목소리를 책에 담아 사회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다.

 

리안 편집장은 삼련서점의 전 회장 천왕슝의 인상적인 말로 이날 발표를 마쳤다. “출판인은 사회를 관찰하는 사람이다.” 목소리가 없던 사회적 약자에게 사회 속에서 소리치게 만드는 것은 그 사회를 관찰하고 있는 출판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인간 삶을 관찰하고 내면의 글쓰기로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들이 있다면 사회를 관찰하고 공개적으로 널리 알리는 출판인이 있다. 관찰자로서 출판인의 역할이 약해지면 새로운 변화를 추동하는, 깃발처럼 힘차게 나부끼며 사회의 건강성과 조화를 꾀하는 힘도 약해진다.

 

1년에 두 번, 이렇듯 내가 하는 출판을 돌아보고 있으니 더욱 분발해야겠다는 다짐뿐이다. 출판을 지속하는 것은 사회를 관찰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반증이다. 나는 오늘도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천천히 들여다본다. 출판인으로서 자주 직무 유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면서.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