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중독자의 야간비행]‘태권V’ 승리를 염원한 세대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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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중독자의 야간비행]‘태권V’ 승리를 염원한 세대는 지금

올해 가을 출시한 초합금 ‘로보트태권V’가 도착했다. 박스를 개봉하자 18㎝ 크기의 로봇모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묵직한 합금량이 느껴지는 로봇의 폼이 제법이다. 1976년도에 등장한 태권V는 지금도 많은 키덜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콘텐츠 태권V의 탄생은 유신시대의 문화정책과 결을 함께했다.

 

1970년대는 장기집권 체제를 굳히려는 박정희 정권이 균열을 내기 시작한 시기다. 1960년대는 본격적인 우민정치를 시도하던 세월이었다. 이후 독재정치의 부작용이 끊임없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정적 제거, 민주인사 탄압, 언론 통제라는 욕망의 정치가 1970년대를 장악했다. 영화, 음악, 문학 등의 대중문화에 대한 정부의 편집증적인 통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부는 1973년 2월 일명 유신영화법이라 불리는 제4차 영화개정법을 시행한다. 이 법은 유신이념의 구현을 위해 영화계의 부조리를 제거하고 영화기업을 적극 육성한다는 이상한 문구를 추가한다. 권력에 비판적이거나 실험적인 문화예술은 강력하게 통제하겠다는 의도였다. 유신정권의 선전물로 퇴락해버린 한국영화산업은 수십 년간 다양성을 잃고 제자리걸음을 반복한다.

 

당시 어린이세대가 좋아했던 만화영화는 MBC TV에서 방영한 <마징가 제트>였다. 헬박사와 아수라백작이 진두지휘하는 괴수로봇에 맞서 싸우는 마징가 제트와 아프로다이 에이스. <마징가 제트>의 매력은 인간이 직접 로봇에 탑승하여 함께 전투를 치른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일본산 로봇만화영화는 그레이트 마징가, 그랜다이저, 건담류의 후속작을 완성한다.

 

<로보트태권V>는 1976년 7월 서울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선을 보인다. 대중문화 폭압의 시대에 등장한 이 작품은 반공만화영화라는 사유를 만들어 까다로운 검열과정을 통과한다. 만화책 분서갱유라는 촌극을 벌이던 군부독재시대의 우울한 풍경이었다. 토종로봇에 전통무술인 태권도를 합쳐 국위선양의 상징물이 되어버린 태권V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김청기 감독은 자신이 인수한 기업 서울동화를 통해서 <로보트태권V>를 완성한다. 노래 ‘세월이 가면’의 가수 최호섭이 부른 <로보트태권V> 주제가는 청소년의 애창곡으로 자리잡는다. 동네 문방구에서는 태권V가 그려진 학용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태권V의 투구는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의 동상에서 착안한다. 정동길 초입의 경향신문사 입구에는 태권V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한편 태권V는 일본로봇만화의 아류라는 소문에 시달리기도 한다. 마징가 제트의 구조를 태권V가 차용했다는 내용이었다. 김청기 감독은 2006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실제 유단자의 태권동작을 보면서 만화영화를 완성했다고 말한다. 같은 해 산업자원부는 태권V에게 대한민국 1호 로봇증을 수여한다. 관객들은 스크린에서 태권품새를 재연하는 로봇을 보면서 국산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낙관했다.

 

태권V는 유신의 정체를 몰랐던 어린이의 희망이자 미래였다.

하지만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만들었다. 태권V의 화려한 이단옆차기에 함께 환호하고 기뻐하던 추억. 성장한 아이들은 민주화시대의 주역, 유신권력의 대리인, 역사의 방관자라는 각기 다른 생을 택한다. 그들은 모두 태권V의 승리를 염원했던 세대였다. 이후 태권V의 인기를 능가할 만한 정의로운 국산로봇의 탄생은 없었다.

 

주제가처럼 아이들은 용감하고 씩씩한 로봇친구를 좋아했다. 태권V의 멋지고 신나는 활약처럼 세상의 일부가 되고 싶었던 시간. 그 마음을 든든하게 지탱해주었던 ‘만화적 상상력’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