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우연히 일찍 집에 들어온 날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IPTV의 영화 목록을 뒤적이다 <레미제라블>을 찾았다. 갑자기 엔딩이 보고 싶어졌다. 장발장이 고단한 삶의 무게를 내려놓는 마지막 장면을 보는데, 갑자기 주책없이 눈물이 흘렀다. 도대체 왜 이럴까. 흐르는 눈물이 이해되지 않았다. 삶을 마감하는 한 인간의 진실한 고백, 남겨진 이들의 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서정적인 음악 때문이었을까? 엔딩은 서로의 얼굴에서 하느님을 본다는 가사에서 자연스럽게 에필로그 노래인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로 넘어갔다. 그래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한참을 울고 나서 도대체 내가 왜 울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던 중 문득 장발장의 모습이 측은했고, 장발장의 모습에서 또 다른 측은한 이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측은한 마음. 남의 불행을 불쌍하고 가엽게 여기는 측은한 마음을 맹자는 인간의 어진 본성에서 우러나온 마음씨라고 했다. 어디 맹자뿐이랴. 예수가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도 그렇다. 예수가 제자와 추종자들과 함께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는데, 성문 가까이에서 장례행렬과 마주친다. 죽은 이는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 오고 있었다. 성서를 인용한다.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말라’ 하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에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셨다. 그랬더니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중략)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근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누가 7, 11-17)
이 에피소드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측은한 마음’이라는 단어다.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다. 그 아들이 어떤 아들이었는지 모르겠다. 능력이 있어 과부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아이였을 수도 있고, 그저 평범하고 착한 아이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망나니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아이였더라도 과부에게는 단 하나뿐인 피붙이다. 그런 피붙이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떼를 지어 과부의 상여를 따라갔다. 이상하지 않은가? 고작 동네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을 뿐인데. 그냥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다고? 아이고, 이제 어떻게 하나’라며 숙덕거리거나, 좀 체면을 차릴 요량이면 적당히 부조금이나 보내면 될 일이다. 동네를 다스리는 관원의 아들이 죽은 것도 아닌데.
하지만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 ‘나인’이란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과부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여겼다. 과부의 마음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고 가여워했다. 그리고 슬픔에 동참해 떼를 지어 과부의 상여를 따랐다. 세상에 유일한 가족인 외아들을 잃은 과부이지만, 그녀에게는 동네 사람들이 있었다. 동네라는 것의 본질은 학군이나 아파트 가격의 오르고 내림이 아니다. 동네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곳이다. 사람을 만나고, 서로의 사정을 나누는 곳이다.
과부의 슬픔에 함께 슬퍼한 동네 사람들을 본 예수도 역시 그들처럼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이게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음을 외면하고, 바로 그 뒤의 기적이 주는 화려함에만 사로잡힌다. 하지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 이전에 그 기적을 가능하게 한 모두의 측은한 마음이 있었다.
2013년 우리가 사는 동네에 서로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까? 측은히 여길 수 있는 것도 서로의 사정을 알기 때문이다. 측은히 여기기는커녕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 대신 남은 건 학군과 부동산 가격표니까.
사람만이 측은한 마음을 갖는다. 2013년, 힐링의 기적을 바라기보다 사람의 측은한 마음을 간구하자. 힐링이 필요해, 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타인의 처지에 제대로 눈길을 주고 우선 그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갖자. 누구를 퇴출시키고, 진실을 밝혀내고, 누구를 때려 부수고, 저격하고, 끌어내리고. 이런 살벌한 단어로 서로를 할퀴지 말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서로를 감화시킨다. 은촛대를 훔친 장발장을 측은하게 여긴 미리엘 신부 때문에 장발장이 변화한 것처럼.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대중문화 생각꺼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화비평]고독과 원한 사이에서 (0) | 2013.06.24 |
---|---|
[문화와 삶]더 작은 축제의 공동체를 꿈꾼다 (0) | 2013.06.20 |
[문화비평]노인을 위한 클래식 (0) | 2013.06.17 |
[별별시선]보정한 얼굴, 진짜 얼굴 (0) | 2013.06.11 |
[문화와 삶]잘했음, 못했음, 안했음 (0) | 2013.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