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노인을 위한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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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비평]노인을 위한 클래식

인구의 고령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사회가 고령화될수록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나이 든 분들을 부양해야 하는 청년들의 부담이 커진다니 그럴 만하다. 고령화는 일자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여가와 휴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득이 없어서 고통을 겪는 노인 문제도 심각하지만 넘치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서 방황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다. 은퇴를 한 후 무엇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것인가의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지가 않다. 촌각을 아끼며 치열하게 일하는 것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알고 살아 온 사람들에게 이제 넘치는 시간은 자유가 아니라 고통이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보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자존감은 붕괴되고 심신이 피폐해지기 일쑤다. 노년을 위해 의미 있는 취미를 개발하고 준비하는 것을 더 이상 사치라고 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공연계에 나타난 청중의 고령화 현상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 주역은 단연코 영원한 오빠 조용필이다. 아이돌을 따라 다니는 청소년들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공연장을 가득 메운 중장년층 청중은 나름 색다르고 감동적이다. 모든 언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조용필의 젊은 창법이 이들을 공연장으로 불러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 성공은 그의 젊은 감각이나 가창력보다는 ‘가왕의 귀환’이라는 스토리에 기인한 바가 더 크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자신들의 삶과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자 하는 중장년층의 감추어진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어쨌거나 나이 든 청중들을 당당하게 공연장으로 불러들인 것만으로도 조용필은 위대하다.

 

'용필 오빠와 기념사진' (경향DB)



클래식 음악계의 청중도 뚜렷하게 고령화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클래식 공연장의 특징은 청중이 매우 젊다는 것이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 공연장에 오면 청중들의 머리 색깔이 검다는 것에 가장 많이 놀란다. 선진국에서는 클래식 공연장을 주로 노인들이 찾기 때문에 객석 뒤에 앉으면 눈앞에 온통 흰 머리들만 보인다. 그러한 광경에 익숙한 외국인 친구들은 객석 가득한 젊은이들을 보고 진정으로 부러워하곤 했다. 하지만 청중이 젊다는 것이 자랑만은 아니다. 젊은 청중은 아무래도 변덕스럽다. 젊음의 속성상 음악의 깊이보다는 스타와 유행을 쫓아 몰려다닌다. 한때 호기심이나 열정으로 음악회장을 찾았던 젊은이들이 나이가 들면서 발길을 끊으니 우리 청중 문화가 성숙해지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클래식 음악만큼 나이 든 분들에게 걸맞은 장르도 없다. 신체기능이 저하되고 활동이 줄어든 노인들이 한창 혈기왕성한 젊은이보다는 차분히 앉아서 음악을 듣기에 훨씬 적합하기 때문이다. 잠시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못하면 불안해지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한 시간씩 공연장에 갇히는 것이 고역일지 몰라도 노인들에게는 편안한 휴식일 수 있다. 또한 많은 인생 경험 덕분에 음악이 주는 감동을 수용할 수 있는 감성도 크다. 클래식이 오랜 세월을 살아낸 음악인 만큼 깊은 인생에 대한 성찰에 기초한 클래식 작품들 하나하나가 노년의 삶을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AP연합)



유일한 장애물은 이제까지 우리나라 노년층이 클래식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들어보지 못한 음악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기회를 만들어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철모르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청소년 음악회’는 많지만 정작 그 음악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어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음악회는 하나도 없다. 아이에게만 교육과 투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학생들에게만 입장권을 할인할 것이 아니라 노인들에게도 할인 혜택이 필요하다.



돈 없는 노년이 불행하다지만 돈만 있는 노년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노인이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선진국이 아닐까. 경제가 어렵고 삶이 힘들다지만 노년의 행복 역시 절박하고 중요하다. 우리 클래식 공연장도 연륜이 있는 노인으로 가득 차는 꿈을 꾼다.




민은기 | 서울대 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