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시선]‘소녀문화’로 재해석한 90년대 회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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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별별시선]‘소녀문화’로 재해석한 90년대 회고담

김선영 | 대중문화평론가


요즘 가장 뜨거운 화제의 드라마는 tvN <응답하라 1997>이다. 33세의 방송작가 시원(정은지)이 고등학교 동창회를 계기로 ‘찬란했던 90년대’와 10대 시절을 돌아보는 내용의 이 드라마는, 최근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 중인 1990년대 회고담에 속한다. 특히 이 작품은 당시 급부상하던 아이돌과 10대 팬덤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환함으로써 단순한 유행상품을 뛰어 넘는 독특한 개성을 획득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응답하라 1997>은 소위 ‘빠순이’ 문화로 폄하돼온 팬덤 문화, 더 나아가 소녀문화 중심으로 재해석한 90년대 이야기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작품의 1997년은 외환위기, 첫 정권교체 등 정치·경제·사회적 이슈 못지않게 중요한 아이돌의 해로 호출된다. 바로 그 전 해인 1996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하고 국내 최초의 기획형 아이돌 H.O.T가 데뷔했다. 그러니까 1997년은 서태지 이후의 대중음악계가, H.O.T와 그 대항마로 데뷔한 젝스키스라는 대형 아이돌그룹에 의해 양분된 해였다.


X세대의 기수로 출발한 서태지가 곧 세대를 초월한 ‘문화 대통령’으로 대중문화를 장악했다면 ‘High-five of Teenager’의 약자인 H.O.T는 그 이름처럼 10대를 겨냥한 그룹이었다. 그들은 ‘전사의 후예’, ‘열맞춰’, ‘위 아더 퓨쳐’처럼 청소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은 노래들을 발표하며 10대들의 대변자를 자처했다.


하지만 이들이 더 정확하게 공략한 대상은 10대 전체가 아니라 소녀들이었다. 즉 기획 당시부터 미소년들을 선발해 순정만화 속 캐릭터를 부여하는 등 소녀들을 위한 맞춤 상품으로 탄생한 것이 아이돌 보이그룹이다. 이들의 상업적 위력에 비해 초라한 문화적 위상과 폄하 섞인 시선은 10대, 특히 소녀들의 사회적 위상과도 관련이 있다.


이를테면 소녀들은 기성세대가 청소년 모두에게 요구하는 규율과 금기의 법칙에 더해 ‘소녀다움’이라는 젠더적 규범까지 요구받는다. 힙합 바지, 멜빵 바지, 폭탄 머리 등 좋아하는 보이그룹의 스타일을 모방한 중성적 패션, 혈서까지 불사하는 격렬하고 공개적인 애정 표현, 팬픽으로 대변되는 성적 판타지의 노골적 표출 등 소녀들에게 요구하는 규범에서 일탈한 팬덤 문화의 대표적 요소들은 그것이 ‘빠순이’ 문화로 폄하당하는 주 이유가 되었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 출연하는 서인국과 정은지 (출처: 경향DB)


<응답하라 1997>이 인상적인 것은 그 소녀들에 대한 기대와 규범을 모조리 배반하는 ‘천방지축 소녀’ 시원과 그 또래 소녀들을 통해 10대 소녀 팬덤 문화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들이 H.O.T나 젝스키스 같은 아이돌스타를 사랑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억누르고 자제하라는 것만 배워 온 소녀들의 욕망에 적극적으로 부응해 준 최초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는 감정공동체로서의 팬덤 문화는 소녀들이 자신의 욕망을 더 당당하고 용감하게 표출하는 데 든든한 울타리로 기능했다. 소녀들은 그 안에서 팬픽의 생산과 소비를 통해 스타를 마음껏 재생산하며 자신만의 판타지를 구축하고, 스타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또래공동체에 대한 열정을 통해 공감과 유대의 중요성을 배우며 성장한다.


그리고 <응답하라 1997>은 이러한 팬덤 문화의 재해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힘의 근원이 소녀문화 자체의 풍요로운 자산에 있음을 보여준다. 가령 이 작품에서 소녀들의 문화는 소년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그려진다. 윤제(서인국)와 소년들이 기껏해야 농구를 하고 야한 사진을 공유하며 스타크래프트를 즐길 때, 시원과 소녀들은 만화와 잡지를 읽고, 라디오를 들으며 사연을 쓰고, 드라마와 영화와 콘서트를 감상하며, 유행하는 패션과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따라한다.


소녀들의 다채로운 문화 향유는 그들이 세간의 시선처럼 단순한 ‘빠순이’가 아닌 1990년대 대중문화의 능동적 주체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작품 첫 회에 등장한 1997년 최고의 인기 드라마 MBC <별은 내 가슴에>는 그녀들의 문화적 감수성이 그 시대의 지배적 감수성이었음을 상징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최진실이 연기하는 평범한 여주인공이 당대의 톱가수 강민(안재욱)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은 10대 소녀들이 꿈꾸던 팬픽의 판타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시원과 친구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원하는 대학은 무리’였던 학창 시절 성적에도 불구하고 2012년 현재 방송작가, 큐레이터, 편파 중계 아나운서 등 트렌드를 주도하는 직업에 종사할 수 있는 원동력은 그녀들의 그러한 문화적 감수성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응답하라 1997>은 그동안 대중문화 담론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온 소녀문화 복권에 대한 외침이자 1990년대 회고담 열풍 속에서 발굴한 빛나는 성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