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 | 칼럼니스트
어릴 때 내 영웅은 구영탄이었다. 또래의 다른 여자 애들이 안소니와 테리우스를 좋아할 때 나만 홀로 구영탄을 좋아했다. 구석에 처박혀서 의기양양하게. 고행석 만화에선 늘 주인공으로 나왔지만 다른 여자 애들은 이 오빠의 매력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뭐 그럴 법도 하지. 보통 여자 애들은 만화주인공 하면 우수에 젖은 듯한 크고 부리부리한 눈에 훤칠한 키, 우월한 ‘기럭지’를 가진 귀공자 타입을 좋아하는데 이 오빠는 척 보기에 그냥 별 볼일 없는 루저처럼 보이니까. 반쯤 감은 눈에 머리카락은 한옥 처마 끝처럼 뻣뻣하게 뻗쳐있고 몸도 축 처진 듯 좀 왜소해 보이는…. 게다가 어찌나 어리바리하고 미래가 없어 보이는지 어린 나이에도 측은지심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걸 느낄 정도였다.
그래도, 누가 뭐래도 난 이 오빠를 좋아했다. 일단 너무 웃겼다. 특유의 무식하고 바보스러운 유머 코드가 있었는데 그게 또 얼마나 재밌던지…. 특히 오직 한 여자 박은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온갖 주접을 다 떨 때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게다가 남들은 알 턱이 없는 매우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평상시에는 그게 잘 드러나는 법이 없고 강하고 악한 무리들과 싸울 때만 쓴다는 거다. 게다가 그 능력을 그냥 실수인 척, 우연인 척 가장하며 어수룩하게 썼기 때문에 더 치명적이었다.
그 캐릭터에 얼마나 동화됐는지 지금도 구영탄을 그저 알기만 해도 “어머 그러세요?” 하며 그 사람의 취향을 한 세 단계쯤 쭈욱 끌어올릴 정도다. 호감지수 팍팍 급상승은 당연지사고.
중학교 때 이야길 하자면 구영탄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좋아하는 남자 애한테 편지를 쓰곤 했는데, 그 애도 구영탄 만화를 좋아해서 박은하라는 이름의 답장을 보내주곤 했다. 김아무개라는 이름의 내성적이고 축농증 때문에 늘 콧물을 달고 살던 얼굴이 유난히 하얀 남자 애였는데 지금은 뭘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간혹 궁금해질 때가 있다.
장 그리니에가 <섬>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고. 좀 시시한 예일 수 있으나 내 경우는 어린시절 구영탄이라는 캐릭터에 흠뻑 빠져 있던 ‘결정적 순간’이 있었던 거. 그 순간들에 의해 지금의 나라는 인간의 기본 정서라든가 취향 같은 게 만들어진 거고. 결코 억지가 아니다.
SBS <추적자.>의 손현주 l 출처:경향DB
생각해보면 정말 그랬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줄곧 난 구영탄스러운 사람들만 편애했으니. 배우로 치면 주성치라든가 양동근 같은 어눌하고 바보스러운 듯 보이지만 누구보다 자기 색깔이 강한 부류들. 대중음악인도 산울림의 김창완이라든가 크라잉너트의 한경록, 아마추어증폭기 같은 서툴고 어리바리한 느낌의 인간들만 좋아라 했다.
그 때문인지 요즘 모두가 이야기하는 드라마 <추적자>의 손현주도 내게는 무척이나 구영탄스럽게 읽힌다. 일단 손현주라는 배우의 이미지가 그렇다. 별 볼일 없는 소시민이고 동네아저씨로서의 그 확고부동한 캐릭터 말이다.
어느 인터뷰 기사를 보니 자기가 실제로도 그렇기도 하다 하고, 아무튼 딸에게 통닭을 못 사줘 전화통을 붙들고 울었다는 고행석이라는 만화가의 손에서 탄생한 어눌하고 비리비리하게 생긴 서민보급형 영웅을 떠올리게 하는 배우. 그러나 평범한 존재의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며 날 즐겁게 하던 구영탄이지만 예외적으로 매우 슬픈 만화도 꽤 있었다.
예컨대 <굴뚝새>나 <절규>, <폭풍 열차> 같은 만화에서는 얼마나 현실적이면서 비극적인지 어린시절 만화방에서 라면 먹다 말고 펑펑 운 적도 있었다. 처음으로 카타르시스라는 걸 알게 된 그 순간을 떠올려보면 지금 손현주가 연기하는 백홍석이 딱 그런 것도 같다.
소위 ‘이 대 팔’ 사회에서 힘 있는 자를 경멸하고 평범하고 하찮은 나 같은 다수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응원하게 만드는 힘이 구영탄과 그의 후예, 백홍석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선가 요즘 TV 시사토론에서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품평을 하다 말고 정치 평론가들이 갑자기 <추적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재미있는 일도 벌어지고 있고. 이참에 구영탄과 백홍석을 아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시를 들려주면 어떨까 싶다.
휘트먼의 <풀잎>(열린책들), 그중에서도 ‘나 자신의 노래’다. 엄청 긴 시인데, 한 1000분의 1로 줄여봤다.
“나는 나 자신을 찬양한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또한 그대가 생각할 터, 내게 속한 모든 원자는 마찬가지로 그대에게 속하므로. …나를 위한 자부심이 있는, 그래서 무시되는 것이 얼마나 아픈지를 느끼는 남자. …나는 승리자들만을 위해 행진곡을 연주하지 않는다. 나는 정복당한 자들과 살해당한 이들을 위해 우렁찬 행진곡을 연주한다. …훌쩍이고 굽실거리는 복종은 사촌에게나 주고, 나는 안에서나 밖에서나 제멋대로 삐딱이 모자를 쓴다. …나는 내가 단단하며 건전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존재하는 것 그대로 존재한다, 그로써 족하다. …한 세상이 알고 있는 바, 이제까지 나에게 가장 큰 것,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대중문화 생각꺼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별시선]‘소녀문화’로 재해석한 90년대 회고담 (0) | 2012.08.27 |
---|---|
[문화비평]우디 앨런의 ‘파리 홍보’ 영화 (0) | 2012.07.27 |
[문화비평]공연장 좌석의 신분적 명칭 (0) | 2012.07.13 |
[별별시선]‘뉴 빅브러더’ 시대의 두 추적자 (0) | 2012.07.02 |
[박영택의 전시장 가는 길]침(針)으로 이루어진 내면 풍경 (0) | 2012.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