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화를 사색하는 것이 오늘날의 중요한 과제라는 것은 꾸준히 듣던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말인즉슨 “빨리, 빨리!”를 외치는 세계에서 한 발짝 물러서자는 것이다. 속도전 사회에서 벗어나 느긋이 사는 버릇을 터득하자는 말도 뻔하디뻔하다. 그렇다고 시간의 문화를 에워싼 변화를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근대의 시간은 더 이상 교회가 관장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라님이 관리하는 일도 아니다. 하루 24시간의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진 것처럼 보이고 우리는 그 시간을 스스로 요령 있게 쓰면 될 듯한 착각에 빠져산다. 중세시대엔 감히 온전히 신에게 속하여 할 시간을 가지고 수작을 부려 돈을 번 고리대금업자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불어나는 돈은 시간을 사취하는 불경한 간계라 여겼던 탓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이자놀이로 돈을 버는 이들을 우아하게 금융업자라고 부르며 부러워하는 편이다. 시간에 관한 생각만큼 근대 사회에 접어들어 크게 바뀐 것도 없어 보일 지경이다.
(경향DB)
그러나 한동안 우리가 머물러 있던 근대적 시간의 좌표가 한결같은 것도 아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는 전에 없던 시간의 세계 속으로 들어섰다. 생애주기란 시간을 예상하고 나이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삶의 위험들, 즉 실업, 질병, 퇴직, 상해 등으로부터 보호해주던 장치들이 무너진 것이다. 생애주기란 국민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한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전체를 셈하고 그들의 생로병사를 헤아림으로써 생애주기는 상상된다. 그럴 때 나의 삶은 전체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럴 때 우리는 느긋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국민은 사라지고 자기를 책임지고 살아가는 개인이 그 자리를 메운다. 각자의 인생을 설계하고 책임져야 할 시대로 입장한 셈이다. 그 결과 새로운 시간의 거푸집에 우리를 맞추라는 매몰찬 압력에 휘둘려왔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나의 삶의 궤적을 예측하고 대비를 하는 게 상책이라고 온갖 곳에서 아우성을 친다. 사회보장이라는 안전장치는 이제 재무설계니 노후설계니 하는 것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삶의 시간을 조망하는 방법 역시 바꾼다. 자신을 돌보려면 시간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시간을 쪼개 영어를 공부하고, 애들을 키우려 온갖 준비를 시켜야 하며, 적시에 대출을 받고 집을 옮겨야 한다. 이는 단순히 바빠진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을 살아가는 방법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이제 나는 모두가 승선한 시간의 배에서 떠나 나의 시간을 항해하는 고독한 조타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녹초가 된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피로사회”에 사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피로야 풀면 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피로를 풀기 위하여 열심히 남은 시간을 쥐어짠다. 언젠가부터 유행하는 휴가 프로그램 가운데 “1박3일 도깨비여행” 같은 것이 있다. 퇴근하자마자 부지런히 짐을 싸 심야비행기를 타고 도착해 출근 시간에 맞춰 돌아오는 여행이다. 말 그대로 악착같이 노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노는 사람”이 제일 “쿨하다”는 상식에 비춰보면 이들은 멋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휴식은 시간을 탈환하는 자리이다. 생존에 빼앗긴 시간을 제한 뒤의 그 시간은 회상과 상상을 위한 시간, 지금에 붙박인 시간을 넘어선 시간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간다. 지금이 아니라 지나간 그 어느 날, 도래할 그 어느 날이란 시간은 휴식에만 있다. 그러므로 휴식의 시간에는 지금이란 없다. 또 그 시간을 경유할 때에만 지금의 시간은 다른 시간이 될 씨앗을 품을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 휴식의 시간이 없다면 다른 삶도, 혁명도, 미래도 없다. 그런 탓에 1박3일 도깨비여행은 내겐 슬픔을 자아낸다. 그것은 시간을 잃은 우리의 묘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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