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그녀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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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와 삶]그녀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박해천 | 디자인 연구자 ecri11@naver.com



 

우연히 단편소설 <침이 고인다>를 다시 읽게 되었다. 1980년생 작가 김애란이 2006년에 발표한 소설이며, 그녀의 두 번째 단편집 표제작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여주인공은 “중등부 1학년만 1000명이 넘는 기업형 학원”의 국어과 강사다. 서울 목동에 위치한 ‘뉴엘리트 학원’. 그녀는 지하철을 타고 매일 그곳에 출근한다. 그리고 그 덕분에 “매달 13평형 원룸의 월세와 의료보험료, 적립식 펀드 한 개와 적금을 부어갈 만한 생활력”을 얻는다. 



“사교육만 제대로 받았어도 이러고 있지 않을 텐데…”라며 신세 한탄도 하고, 공기업에 취직한 후배를 보며 질투도 느끼지만, 월급이 제공하는 경제적 안정감만큼은 포기하지 못한다. 물론 그녀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만만치 않다. “인생의 어떤 부분을 가불받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그것이다.


 

특목고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목동의 한 특목고 입시 종합학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경향신문DB)



소설은 주인공의 일상에 대학 후배가 끼어들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내가 두 번째 읽으며 궁금했던 것은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주인공이 느끼는 불안감의 정체였다. 일견 그것은 그 또래가 흔히 경험하는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혹시 그녀의 일상을 지탱하는 두 축, 즉 학원과 원룸의 2000년대적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일단 그녀가 출근하는 ‘뉴엘리트 학원’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대개의 기업형 학원들이 그러하듯이, 그녀의 학원 역시 386세대의 운동권 출신이 운영하는 곳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 사교육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던 서울 주요 지역의 학원장들은 과거 한때 군부독재에 저항하며 사회 변혁을 꿈꾸던 이들이었다. 수배나 전과 기록으로 인해 취업이 쉽지 않았던 그들은 1990년대 초반에 변두리 학원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호구지책이었다. 그러다 1994년에 대학 입시가 수능시험으로 바뀌고 논술 비중이 높아지자, 사교육 서비스의 산업화를 실현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이 시기, 이들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 주변에서 학원을 운영하면서 1940~1950년대생 중산층 부모의 경제력을 성장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리고 인터넷의 보급과 더불어 강의 콘텐츠의 유통망을 확대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했고, 그 이후에는 코스닥 상장을 통해 학원 사업의 산업화를 완성하려고 했다. 30조원 규모로 팽창한 사교육 시장과 80%에 육박하는 대학 진학률, 그리고 들썩거리는 자산 시장은 그들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녀 일상의 다른 한 축인 13평 원룸은 어떤가? 


그녀는 학원에서 받은 월급의 일부로 이 원룸 오피스텔의 월세를 지불한다. 만일 그녀가 월세 계약 당시 공인중개사가 한번 확인해 보라고 건네준 등기부등본을 제대로 살펴보았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분양 당시만 해도 자신이 빌린 원룸의 분양가가 5000만원에도 못 미쳤다는 사실, 집주인은 분양권 구입을 위해 3000만원가량을 대출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2006년 시점의 시세가 2배 가까이 올랐다는 사실 말이다.


이쯤 되면, 주인공은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자신이 지불한 월세가 집주인의 자녀 사교육비로 학원으로 흘러들었다가 다시 자신의 월급 일부로 되돌아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말이다. 혹시 “인생의 어떤 부분을 가불받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그녀가 바로 사교육 시장과 자산 시장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매트릭스 안에서 ‘입시 정보’의 전달자이자 ‘임대료’의 연결 통로로 비비 꼬인 채 소모되고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소진되는 청춘이 어디 그녀뿐이겠냐고 말이다. 그런데 문득 드는 의문. 2006년의 그녀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그곳에서 빠져나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