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 2016년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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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비평] 2016년의 바람

최근 방송에서는 다양한 남성의 모습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 제작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그런 남성의 모습에 익숙한 시청자도 있을 것이고, 즐거움을 느끼는 시청자도 있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tvN <집밥 백선생> <헌집줄게 새집다오> <수컷들의 방을 사수하라> <삼시세끼> <어쩌다 어른> <내 방의 품격>, JTBC <유자식 상팔자> <마리와 나>, O’live <오늘 뭐 먹지> 등이 이에 해당하며 ‘다양한, 변화된’ 남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집이라는 공간에서 가사노동과 관련된 역할수행을 하는 모습을 공통적으로 보인다. 가장으로서의 어려움, 가족을 배려하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후회, 부부가 함께 육아문제를 해결하거나 가사노동을 함께 수행하는 모습, 요리과정의 지혜를 전달하며 집밥을 손쉽게 만드는 모습, 그리고 청소년 자녀와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등이 지금 방송에서 볼 수 있는 남성의 모습이다.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남성의 ‘변화된 모습’은 한국 사회의 가족관계를 꽁꽁 묶어 두었던 가부장제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오랜 기간 양성평등 교육의 결과와 대중의 젠더에 대한 인식 변화의 결과물로서 의미보다는 경제적 위기, 신자유주의 체제의 유입 등으로 인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경제적 활동은 남성이, 가사노동은 여성이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던 역할 구분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맞벌이 부부의 증가, 1인 가족, 만혼, 이혼, 재혼 가정의 증가 등 가족 구성방식도 변화했다.

결국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체제가 결합되면서 나타난 사회 변화에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적응해야 했고, 가부장에 근거한 남성과 여성의 역할도 점차 변화하게 된 것이다. 2005년 방송된 SBS 드라마 <불량주부>가 큰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가부장적인 남성이 전업주부가 되면서 아내와 남편의 변화된 ‘성역할’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통해 남녀 평등이 실현되었다고 규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러한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 탈가부장적인 시도가 아닌 경제적 필요에 의해 채택한 가족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다시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JTBC의 예능 프로그램 <최고의 사랑>에 출연하는 김숙과 윤정수가 보여주는 부부관계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경제적 파산을 한 남편 윤정수는 집안에서 가부장적 가장의 위치를 얻지 못한다. 성공적 재테크를 통해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아내 김숙이 가부장의 역할을 대신 수행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경제적 관계로 서로의 위계관계를 확인한다. 과거 가부장적 남성이 했을 법한 말과 행동을 여성이자 아내인 김숙이 계속 함으로써 아내 중심의 위계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 물론 아내가 남편보다 높은 위계적 위치에 놓인다는 설정은, 새롭고 흥미롭지만, 결국 우리 사회 남녀 평등의 관계가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경제적 전략에 따라 선택된 방법임을 보여준다는 점은 좀 씁쓸하다. 결국 경제적 필요에 의해 채택한 가족의 전략을 예능 프로그램에서 은유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경제위기로 한국 사회 구성원으로서 따라야만 했던 젠더 역할수행론은 변화하고 있고, 젠더 간 충돌을 가시화시켰다. 이 충돌은 남성의 변화된 모습을 재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가정 내에서의 여성의 모습은 여전히 가사노동의 책임자 그 이상의 모습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일·가정 양립지표’에 따르면, 한국의 2014년 맞벌이 가구의 경우 남자 가사노동시간은 40분으로 5년 전 37분보다 3분 증가했고, 여성은 3시간20분에서 3시간14분으로 6분 감소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별 가사노동시간에서도 한국 남자의 가사노동시간이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적 활동을 함께하는 맞벌이 부부라 할지라도 집안일의 책임은 여성이 주로 지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에코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는 자본주의는 가부장제 없이 작동하지 않으며, 이 체제의 목적인 자본 축적은 가부장적 남녀 관계가 계속 유지되거나 새로 재구축되지 않는다면 성취될 수 없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 미디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부드러운 남성, 새로운 아빠의 모습, 새로운 직업군에 진출한 남성 등의 모습은 이것이 원래 정상적인 남녀 관계이며, 가부장적 틀을 벗어난 남녀 관계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부장제를 벗어난 가족 관계, 남녀 관계를 새롭게 구축하려는 시도가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 역시 막장드라마 속 그들만의 권력투쟁을 일삼는 것보다는 좀 더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2016년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종임 |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