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독 재난 서사가 전방위적으로 유행한 해였다. 봄에는 OCN <더 바이러스>와 JTBC <세계의 끝> 등 바이러스를 소재로 한 재난 드라마가 두 편이나 안방극장을 찾는 흔치 않은 일이 벌어졌고, 여름에는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감기> 등 재난 영화들이 극장가를 장악했다. 서점가에선 정유정 작가의 재난 소설 <28>이 출간과 동시에 돌풍을 일으켰다. 좀비 영화 <월드워Z>, 우주재난영화 <그래비티> 등 해외 작품까지 포함하면 화제작 목록은 더 늘어난다.
눈에 띄는 것은 국내 창작자들의 재난 서사 가운데 SF 재난영화 <설국열차>와 테러재난영화 <더 테러 라이브>를 제외한 네 편이 감염재난물이라는 점이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를 쫓는 수사극(<더 바이러스>), 인간 신경계를 교란시키는 변종 바이러스의 공포를 다룬 의학스릴러(<세계의 끝>), 사랑하는 여인의 딸을 구하려는 남자의 모험과 액션이 가미된 재난영화(<감기>), 인수공통전염병이 확산되는 과정의 묵시록을 냉철하게 기록한 28일간의 이야기(<28>) 등 각각 성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괴바이러스가 불러온 재난과 고뇌를 다루고 있다. 지난해에도 한국 최초의 감염재난영화 <연가시>가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 <연가시> 중 한 장면(출처 :경향DB)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따라온다. 다양한 재난 서사 중 왜 하필 감염재난물이 유행하나. 그 이유는 감염재난 서사가 지닌 특수한 정치적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이 장르의 서사 안에는 감염의 성격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국가의 통제 이야기가 포함된다. 즉 감염재난물의 진정한 공포는 감염 그 자체보다 국가권력에 의한 통제가 이끌어내는 두려움인 경우가 많다.
최근 유행하는 국내 감염재난 서사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유난히 두드러진다. 이 작품들은 감염의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제를 찾기 위한 사투의 드라마보다, 주로 국가 비상사태라는 명목하에 공권력이 밀어붙이는 ‘격리와 통제의 비극’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컨대 <연가시>에서 감염자들을 치유의 목적보다는 그 감염 증상인 집단 자살로 인한 사회적 불안과 소요의 차단을 위해 격리시키는 것처럼, 서사 전체에 ‘감금과 폐쇄’의 성격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세계의 끝>에서도 감염자 격리병동이 점점 “사방천지가 철문으로 꽉 막”히고 경찰들이 엄중하게 감시하는 “병원의 탈을 쓴 수용소”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감기>와 <28>에서는 아예 도시 전체가 폐쇄 공간이 된다.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문제해결 능력을 상실한 정부가 계엄령에 준하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진원지를 봉쇄하는 최악의 통제로 치닫는다.
이러한 강압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 장면이 등장하는 것도 이 작품들의 공통점이다. 특히 <감기>와 <28> 속 시위는 5·18 민주화운동을 연상시킨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실제로 정유정 작가는 <28>의 주 배경인 가상의 도시 ‘화양’이 광주를 상징한다고 밝힌 바 있다. 국민을 감염자와 비감염자로 구분하고 감염자를 국가질서의 적으로 규정해 폭압적인 통제로 다스리는 재난 서사 속의 국가권력, 많이 낯이 익다.
재난 서사의 유행은 그 사회의 위기를 반영한다. 할리우드에서 재난영화가 크게 유행했던 1970년대의 미국이 워터게이트, 베트남전 패배 등으로 정치·사회적 위기에 처해 있었고, 9·11 테러 이후 미국인들의 불안감이 테러재난영화의 유행을 이끌어낸 것처럼. 최근 국내 감염재난 서사의 유행에도 통제와 검열의 시대라는 지금 한국 사회현실의 맥락이 작용하는 듯 보인다.
국제 언론자유 감시단체 ‘국경없는기자회’가 평가한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부터 계속해서 하락 중이고,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는 2012년 ‘인터넷상의 자유’ 보고서에서 한국의 인터넷 자유가 퇴보했다고 평가하며 ‘부분적 자유국’으로 강등시켰다. 정부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목소리는 곧 ‘종북’으로 귀결되는 것도 이제는 흔해진 풍경이다.
감염재난물에서 바이러스는 주로 호흡기를 통해 전염된다. 그만큼 이 장르는 시대의 공기에 민감하다. 갈수록 축소되는 표현의 자유와 통제의 강화가 한국형 감염재난 서사의 유행을 이끌어내고 있다.
김선영 | 드라마비평가 herla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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