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반 만에 다시 밟은 서울 땅. 무위의 미덕을 발휘하는 지도자를 맞은 한국 땅은 의외로 잔잔했다. 검찰이 전두환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장면에서도 사람들은 후련해하지 못했고, 검찰이 부실하나마 국정원의 선거개입, 즉 지난 대선은 부정선거였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했음에도 세상은 예상보다 요동치지 않았다. 오자마자 찾아간 서울시청 앞. 촛불 든 사람 수는 2008년에 비할 바 아니었다. 그때에 비해 사안은 더 중대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파리에서 시국선언을 하러 모였던 이들의 일치된 의문도 이 점이었다. 왜 사람들은 단지 ‘국정조사’를, ‘책임자 처벌’을 바라는 걸까. 부정선거가 명확하다면, 바로 선거 무효를 주장하는 게 수순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원인이 조금씩 파악된다. 첫째는 민주당의 무능에 대한 탄식이다. 진보진영이 사실상 산산조각난 상태여서 다른 대안도 찾기 어렵다. 법리상 ‘선거 무효’ ‘박근혜 하야’ 요구가 맞지만 대통령 하야를 요구한들, 민주당이 이 지난한 과업을 수행해내리라 보지 않는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부터 명확한 대안이 있을 때만 불의를 말해왔던가.
촛불가득한 청계광장 (경향DB)
TV를 켰다.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보며 씁쓸한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 로맨틱 코드가 있는가 하면, 법정드라마인 만큼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 펼쳐진다. 정의로운 쪽이 마냥 불쌍하고 처절하며 도덕적이지만은 않다.지난 목요일 방영분에서 법정드라마 묘미는 절정에 달했다. 26년 전 판사는 무고한 사람에게 아내를 죽인 살인자로 단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죽이지 않았고, 아내는 죽지 않았다. 단지 아내가 죽은 척 일을 꾸몄을 뿐이다. 판결 이후 판사 앞에 몰래 나타난 아내는 그의 엄청난 실책에 대해 입다무는 조건으로 자신의 딸을 입양해줄 것을 요구한다. 출소한 남편은 아내를 찾아가고, 뻔뻔하게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는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죽은 것으로 판명돼 남편을 살인범으로 몬 여자에게, 다시 상해를 입힌 남편에 대한 희한한 재판이 시작됐다. 검사는 주장한다. “아무리 화가 나고 억울해도, 죄를 저지른 사람을 스스로 폭력으로 응징해서는 안된다”고. 이에 장 변호사는 응수한다. “물론 피해자를 만났을 때 법으로 해결했어야 한다. 하지만 피고인에게 법이란 무엇이었을까. 딸과 그의 26년 인생을 뺏어간 것이 법이었다. 그런 피고인에게 우리는 또 법을 강요하고 있다. … 오늘 이 재판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가리는 재판인 동시에 과거 사법부의 유무죄를 가리는 자리다. 피고인에게 국민이 생각하는 법의 평결을 보여주시길 바란다.” 결국 배심원들은 ‘국민의 이름’으로 사법부의 유죄, 무고한 피고인의 무죄를 선언한다. 전율과 감동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SBS 너목들 방송 캡처
이 민감한 시점에, TV 드라마에서 사법부 과오를 국민들이 심판하는 시나리오가 전개된다는 것. 시기를 활용하는 드라마 작가의 영리함을 칭찬하기에 앞서, 그 대사가 전달하는 강렬한 메시지를 온몸으로 느껴보자고 말하고 싶다. 불의가 심판되지 않고 지나온 세월이 너무 길었고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은 무기력에 빠졌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 건드려주기만 하면 터질 초강도의 울분이 우리 속에 있지 않은가.
국민 요구대로 국정조사는 시작됐지만, 집권당과 국정원은 출석조차 안 하고 있다. 국회와 경찰, 집권자 그리고 국가를 지키라고 만들어 놓은 국정원이 법을 거스르며 민주주의를 모독하고 파괴하는 상황에서 공권력도 이 과오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면,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이는 거리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뿐이다. 26년 전에 그랬듯이, 이제 다시 근본부터 허물어져가는 이 사회의 민주주의를 시민들의 맨손으로 일궈야 할 때가 왔다.
목수정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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