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꽃보다’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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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꽃보다’ 인생

지난해 <꽃보다 할배>에서부터 시작된 ‘배낭여행 프로젝트’의 종착지는 <꽃보다 청춘>이었다. 앞서 내보낸 <꽃보다 청춘> 페루 편에 이어 현재 방영 중인 라오스 편까지 호평과 높은 시청률을 모두 얻어내면서, 이 시리즈는 한국 예능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성공적 프로젝트로 기록될 듯하다. 심지어 <꽃보다 할배>는 국내 예능 프로그램 최초로 미국 리메이크도 결정됐다. 시리즈 총연출자인 나영석 PD는 리메이크 비결로 ‘버킷리스트’나 ‘노년의 우정’ 같은 보편적 요소들을 꼽기도 했다.

그런데 ‘꽃보다’ 시리즈를 돌이켜보면 오히려 각 여행기마다 그 출연자 세대의 한국적 맥락과 특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점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즉 출연자들의 나이가 각각 평균 76세(<꽃보다 할배>), 43세(<꽃보다 청춘> 페루 편), 27세(<꽃보다 청춘> 라오스 편)임을 알리고 시작한 이 시리즈에는 한국의 세대별 자화상이 투영되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 전체가 한국 사회의 압축적 연대기라 해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다.

가령 시리즈 1탄인 <꽃보다 할배>가 비추는 것은 국가 주도의 급속한 산업화와 양적 성장 시대를 바쁘게 통과하면서 사적이고 여유로운 청춘기를 건너뛴 노년의 초상이었다. 이순재가 스위스 루체른에서 만난 젊은이에게서 1년간 모은 돈으로 6개월 동안 홀로 배낭여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면서도 부러워하던 장면이 대표적이다. 다른 출연자들도 입을 모아 ‘우린 젊었을 때 이런 경험을 일찍 하지 못했다’며 회한 섞인 감상을 내비쳤다.

그런가 하면 <꽃보다 청춘> 페루 편이 그려낸 것은 20대 청춘을 1990년대의 대중문화 황금기와 함께 보내고 40대에 들어선 이들의 자전적 서사다. 여행자인 유희열, 윤상, 이적은 유명 뮤지션이기 이전에 그 시절 ‘청춘의 표상’과도 같은 인물들로 그려졌다. 무방비로 떠난 여행에서 모든 일정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모습에서는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배낭여행 1세대다운 여유가 엿보이고, 그들의 여정 위로는 상징적이게도 신세대 문화의 대표적 아이콘이던 미국 시트콤 <프렌즈>의 주제곡이 들려온다. “20대 때는 반항기로 가득했으나 언젠가부터 자신감이 사라지고 기성세대가 되어갔다”는 이적의 말처럼, 페루 여행기는 어느덧 지루한 중년이 되어가는 X세대의 고민을 따라가는 여정과도 같았다.

마지막으로 <꽃보다 청춘> 라오스 편은 요즘 젊은 세대 이야기였다. 제작진은 페루 편이 그러했듯이 출연자인 유연석, 손호준, 바로에게서 연예인이기에 앞서 이제 막 인지도를 쌓아가는 사회초년병으로서의 면모를 끄집어내어 이 시대 청춘의 초상을 그려내고자 한다. ‘인생의 지혜는 없다. 가진 건 맨몸뚱이뿐’이라는 슬로건과 ‘역대 최저예산’이라는 여행 경비는 말 그대로 별로 가진 것 없는 청춘들의 조건이 되고, “3년 내로 결혼하고 싶지만 금전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준비가 안될 것 같다”고 걱정하던 손호준의 말은 ‘평범한 31세 청춘의 고민’과 다르지 않았다.

tvN '꽃보다 할배' 제작발표회에서 출연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이처럼 청춘에서 노년까지, ‘꽃보다’ 시리즈가 그려낸 긴 여정은 사실 하나의 공통적 테마를 향하고 있다. 바로 분주한 일상속에서 잃어버린 꿈과 그 복원으로서의 여행기다. ‘할배’들에게는 정신없이 바빴던 청년 시절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버킷리스트’의 실천이었고, 40대에게는 ‘상실의 꿈’을 되찾는 여정이었으며, 젊은이들에게는 “첫 배낭여행”이라는 손호준이나 바로처럼 애초부터 결핍된 꿈을 찾는 여행이었다.

그 꿈은 결국 끝없는 자기계발과 성공지향적 삶을 강요해왔던 한국 사회가 놓친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기도 하다. “여기 오니 행복이란 게 단순해지는 거예요. 내게 꼭 필요한 것과 좋은 사람들만 있으면 되거든”이라고 이야기한 유희열의 고백처럼. 그런 면에서 ‘꽃보다’ 시리즈는 우리의 현주소를 비추는 리얼 예능인 동시에 그 이면의 꿈과 만나게 하는 지극한 판타지다.


김선영 | 드라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