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기 TV의 해법은 가족코드다. 생존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질수록 최후의 보루로써 가족의 가치도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올해 상반기 TV 장르별 기록만 봐도 알 수 있다. 드라마분야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은 부녀의 화해를 다룬 KBS 가족극 <내 딸 서영이>였고, 교양분야에서 흔치 않은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며 큰 반향을 일으킨 프로그램은 <KBS 파노라마>의 가정의달 특집 다큐멘터리다. 또 광고부문에서 ‘소비자가 뽑은 좋은 광고상’ 대상 수상작도 가족코드를 내세운 캠페인이었다.
가족코드의 강세 현상은 특히 예능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상반기 최고 예능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MBC <일밤-아빠! 어디가?>를 비롯해 올해만 해도 MBC <나 혼자 산다>, KBS <해피선데이-맘마미아>와 <가족의 품격 풀하우스> 등 다양한 가족예능이 신설됐다. 케이블과 종편 채널을 합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난다.
하지만 최근의 가족예능 열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힐링코드로만 받아들이기엔 모순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가족예능의 두 얼굴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양면성은, 출연자 성별만 다르고 유사한 내용과 형식을 취한 두 쌍의 프로그램을 비교할 때 잘 드러난다. 아빠들의 육아기를 그린 <일밤-아빠! 어디가?>와 처가살이를 다루는 SBS <자기야-백년손님>, 그리고 두 프로그램의 여성버전이라 할 수 있는 SBS E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엄마>와 JTBC <고부 스캔들>이 그것이다.
먼저 남성 가족예능인 <일밤-아빠! 어디가?>와 <자기야-백년손님>이 보여준 얼굴은 전통적 성역할 인식에 대한 변화의 가능성이다. 전자는 아내 없이 아이와 여행을 떠난 아빠들의 좌충우돌 육아기를 통해 전통적으로 여성전담 영역으로 인식돼온 가사육아노동의 가치를, 후자는 남성들의 처가살이를 통해 고부관계 위주이던 가족 서사에서 장서관계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한다. 실제로 두 프로그램은 최근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대중매체 모니터링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일밤-아빠! 어디가?> 캡처
하지만 더 깊이 보면, 두 프로그램에서 아내의 자리를 서툴게 대체하는 남성들의 모습은 오히려 여성의 부재로 인한 결핍을 두드러지게 한다는 점에서 성역할 고정관념을 은밀히 재생산한다는 혐의가 있다. 기존의 엄격한 가부장에 비해 친근해지고 인간적으로 변화했지만, 남성 가족예능이 공고화하는 모습은 결국 가족의 최종 보호자·책임자로서의 권위적 얼굴이다. 그것은 여전히 전통적인 가부장의 얼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보다 심각한 것은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엄마>와 <고부스캔들>처럼 전통적 성역할을 더욱 노골적으로 재생산하는 여성 가족예능들이다. <일밤-아빠! 어디가?>의 서툰 육아기와 대조적으로 엄마들의 전문적 육아교육법을 내세운 전자는 기존의 교육에 반기를 든 ‘맘스쿨링’의 세계를 표방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확인하는 것은 너무도 익숙한 모성의 고정석일 뿐이다. <고부스캔들>도 마찬가지다. <자기야-백년손님>의 장서갈등보다 고부갈등이 훨씬 심각함을 말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극적인 갈등만 부각시키며 진부한 고부 막장드라마에 머물고 만다.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엄마
두 프로그램의 이러한 한계는 <일밤-아빠! 어디가?>의 또 다른 여성버전이라 불리는 <해피선데이-맘마미아>와 또 하나의 시월드 스토리인 채널A <웰컴 투 시월드>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여성 출연자 중심의 가족예능이 오히려 여성들의 성역할 고정관념을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요컨대 불황기의 치유코드를 내세워 버라이어티계의 대세가 된 가족예능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친근하지만 그 권위는 흔들리지 않는 가부장이며, 다른 하나는 여전히 아내, 며느리, 엄마라는 익명의 얼굴에 갇힌 여성이다. 두 얼굴이지만 실은 동일한, 보수화된 우리 사회의 초상이다.
김선영 | 드라마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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