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는 싸이의 ‘라잇 나우(Right Now)’ 19금 판정과 해제를 두고 온 나라가 시끄럽더니 이제는 아이돌 스타들의 선정성에 대한 검열 논란이 뜨겁다. 외모로만 보자면 자기가 자유분방하게 생겼기 때문에 뜰 수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싸이와 서구 미녀들에 대한 우리의 오랜 콤플렉스를 단번에 날려버린 아이돌 스타들 간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둘이 대중음악에 대한 통제와 금지라는 똑같은 문제로 도마에 올랐다. 사실 근대화 이후 우리나라 문화계는 외부 검열과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으며, 때로 그것은 자기 검열과 통제라는 병리적 현상까지 초래하기도 했다.
문화를 검열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발상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뿌리 깊은 것이다. 기원전 4세기에 이미 플라톤은 이상국가를 실현하려면 도덕성 높은 청년들을 양성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동양도 예외는 아니다. 공자도 <예기(禮記)> 악기(樂記) 편에서 음악을 통해 예가 바로잡히고 정치의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니, 음악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뒤집어보면 결국 지혜로운 선각자 혹은 권력자가 자신들의 목적에 맞지 않는 음악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나, 금지시켜야 한다는 위험한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다.
‘라잇 나우’가 수록된 가수 싸이의 정규 5집 앨범 ‘싸이파이브’ (출처: 경향DB)
재미있는 사실은 독재자일수록 플라톤과 공자의 훌륭한 다른 교훈들은 무시한 채 유독 문화에 대한 검열과 통제에서만 그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려 한다는 점이다. 이는 검열이나 통제가 원천적으로 불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하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인정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정부가 작품을 검열할 능력이 있는가?
무엇이 예술이고 외설인지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가사에 특정 단어가 들어갔다고 외설이 되는 것도 아니고, 특정 신체부위를 집중적으로 비추었다고 해서 음란해지는 것도 아니다. 흔히들 그럴수록 더 세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준을 구체적으로 만들수록 종종 현실과 동떨어진 결정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실제로 검열의 피해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역설이다. 지난해는 청소년에게 해로웠던 싸이의 ‘라잇 나우’가 올해는 해롭지 않단 말인가? 검열은 이렇게 희극적인 결과를 얼마든 만들어낼 수 있다.
검열을 논하기 전에 국가가 먼저 할 일이 있다. 어떻게 하면 건전한 문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김연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는 힘 있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같이 사진을 찍으려 하더니, 이제 싸이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자 국가가 문화 표창을 주겠다고 야단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혼자 고생해서 이루어놓은 성과를 두고 국가가 생색내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해야 우리 젊은이들이 마음껏 ‘끼’를 발산할 수 있을지 국가가 고민한 적이 있는가?
학교에서 음악 수업은 국·영·수 과목에 치여 죽은 지 오래다. 음악뿐 아니라 모든 예체능 수업이 그렇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적 성공을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국·영·수의 성공일 뿐이다. 그나마 학교에서 배우는 음악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의 거리는 한참 멀다. 연예기획사가 만들어내는 한류 스타를 학교와 동네가 키울 수는 없을까?
한류 스타를 위한 전용극장도 좋지만, 우리 청소년들이 친구들과 어울려 밴드도 하고 노래도 맘껏 부를 수 있는 공간과 여유를 만들어주는 것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것은 해롭다고만 말하고, 정작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도 해주지 않는 어른들은 내가 생각해도 무책임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음악을 통해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싸이 노래의 가사처럼 뛰게 해주어야 한다. 기죽지 않고, 굴하지 않고, 쿨하게. 라잇 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