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1990년대 ‘감성 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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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비평]1990년대 ‘감성 복고’

김영찬 | 한국외대 교수·문화연구


최근 한국의 대중문화판에서 그중에서도 특히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지형을 지배하는 주요 코드로는 복고(<써니> <건축학 개론> <응답하라 1997>), 동성애(<아름다운 그대에게> <응답하라 1997>), 타임 슬립(time slip, <옥탑방 왕세자> <인현왕후의 남자> <닥터 진> <신의>)을 들 수 있다. 장르라는 측면에서 보면 팩션(faction)을 기초로 하거나 타임 슬립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서사구조를 지닌 로맨틱 판타지 형식의 퓨전 사극(<뿌리 깊은 나무> <광해> <옥탑방 왕세자> <인현왕후의 남자>)이 넘쳐나는가 하면, 메디컬 드라마(<골든타임> <제3병원>)가 뚜렷한 강세를 보이는 것도 특징적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소위 ‘감성 복고’ 드라마의 등장이 단연 눈에 띄는데, 바로 지난 9월 종영한 tvN의 <응답하라 1997>이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대의 문화적 기억과 경험을 소환하는 이 드라마는, 1990년대 후반에 부산에 살던 한 여고생과 친구들의 성장사이자 러브스토리이면서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의 재미는 HOT 광팬인 여주인공의 ‘빠순이’로서의 ‘팬질’에 관한 리얼한 에피소드들을 중심축으로 삼아 과거와 현재를 교차편집해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에 있다. 영화 <건축학 개론>과 같이 ‘추억 돋는’ 당시의 노래, 소품, 상황들이 깨알같이 배치되어 있는 이 드라마의 또 다른 특징은 ‘지방색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다. 걸그룹 에이핑크의 정은지는 터프하면서도 귀여운 부산 소녀(성시원)로 완벽하게 빙의하여 경상도 사투리를 거침없이 구사하고, 남자 주인공인 서인국(윤윤제) 역시 자연스러운 부산 사투리를 들려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가시나, 간땡이가 부었나.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제야 들어 오노? 얼굴이 무기면 낮에 댕기든가, 열두시 넘으면 집에 일찍 기들어와야 할 거 아이가?” 


정은지와 서인국이 출연하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출처: 경향DB)


사투리가 우리 대중문화 텍스트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대략 작년부터 시작된 비교적 최근의 트렌드인데, 영화 <써니>의 여자 주인공이 ‘욕 신공’을 펼칠 때 보여주는 전라도 벌교 사투리, <더 킹>의 여주인공 하지원의 이북 사투리, <샐러리맨 초한지> 이범수의 충청도 사투리 등이 있었다. 그러다 올 들어서는 가히 ‘경상도 사투리의 습격’이라 해야 할지 <메이퀸> <해운대 연인들> <골든타임> <응답하라 1997>과 같은 드라마들이 모두 질펀한 ‘갱상도’ 사투리, 부산 사투리를 보여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역성’이라고 하는 범주가 철저히 터부시되던 우리 텔레비전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상징적인 변화다.


한국 텔레비전의 문화사를 굳이 들춰보지 않아도, 1970~80년대에 제작된 대부분의 드라마에 지방에서 상경하여 도시 하층민으로 편입된 계층의 사람들을 특정 지역 출신으로 묘사하는 재현의 관행이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되면서 특정 직업군과 특정 지역을 연결 짓는 재현 방식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울 말씨는 단지 도시성, 현대성, 세련됨뿐 아니라 ‘표준’과 ‘정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굳어져 왔다.따라서 비록 ‘복고’라는 명분(pretext)하에 이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이와 같이 지역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또 그것을 대다수 수용자들이 저항감 없이 발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문화정치(cultural politics)적 층위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성장기의 사적인 기억들과 경험 세계를 세밀하게 추적하여 복고라는 이름의 문화상품을 만들어내는 문화적 기획은 이제 점점 젊은 세대를 타깃으로 삼는 경향을 보인다. 1980년대를 추억하는 <써니>에 이어 이제 1990년대 초반과 중후반을 변별력 있게 기억하는 <건축학 개론>과 <응답하라 1997>까지 등장한 걸 보면, 중년 세대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며 1970년대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시대는 지나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시봉 친구들’을 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