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12월, 환희의 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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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비평]12월, 환희의 송가

민은기 | 서울대 교수·음악학


찬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벌써 12월이다. 연말이 되면 1년 내내 공연장 근처에 한번 가지 않던 사람들도 여기저기 송년음악회 정보를 뒤적이게 된다. 한 해를 아무런 이벤트 없이 그대로 보내기에는 뭔가 아쉬워서일 것이다. 


우리나라 송년음악회의 간판은 올해도 어김없이 헨델의 ‘메시아’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 차지했다.국내 음악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계적인 교향악단들도 한 해의 끝을 대부분 이 두 곡 중 한 곡으로 마무리한다.


 두 작품 모두 인생의 근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메시아’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인류의 구원에 대한 염원을 노래하고 있고, ‘환희의 송가’를 소재로 한 ‘합창’ 교향곡은 인류의 평화와 사랑을 외친다. ‘메시아’는 작곡된 지 거의 300년이 지났고, ‘합창’은 200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이 작품들을 들으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 대중가요의 인기가 1주일을 채 못가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대중가수가 클래식 음악계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인기를 얻는 데까지 거꾸로 수 백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말이다.


지난달 28일 공개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환희의 송가' 부분. (출처: 경향DB)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가스실로 가는 길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불렸는데, 유대인들은 여기로 줄지어 들어가면서 공포를 이기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부르던 노래가 바로 베토벤 ‘합창’ 교향곡의 ‘환희의 송가’이다. “환희여, 아름다운 주의 빛이여, 우리는 그대의 성소로 들어가리. 그대의 날개가 머무는 곳에서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리.” 그런데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독일 장병들은 유대인들을 죽이기 위한 기계들을 정비하면서 바로 그 ‘환희의 송가’ 선율에 맞추어 휘파람을 불었다. 죽음 앞에 몰린 유대인들이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서 자신들을 ‘영원한 성소로 안내할 환희의 빛’을 노래했다면, 히틀러와 나치 정권은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리’라는 가사에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인류가 하나 되는 그 세상을 반드시 독일인이 이룩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합창’ 교향곡은 곡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감동 드라마다. 음악이 시작하기 전에는 철저한 침묵이며, 한 점의 빛도 없이 칠흑같이 어두운 암흑이다. 그러나 음악이 시작되면 이 혼돈의 세상에 하나씩 둘씩 빛줄기가 나타난다. 처음엔 미약하지만 이내 빛 조각들이 모아져 합쳐지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든다. 벅찬 감동 속에서 웅장한 클라이맥스가 나타나고 환희에 가득한 신의 빛을 외치면서 곡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할 당시 그는 청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귓병도 심각했지만, 기관지와 장 때문에도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건강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집안에서는 조카의 양육권을 두고 제수와 법정 투쟁을 하고 있었고, 빈 음악계에서는 그의 음악이 지나치게 심각하다고 해서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말 그대로 생존자체가 고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베토벤이야말로 암흑과 혼돈 속에서 음악을 통해 신의 빛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토록 강렬한 환희와 승리의 외침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독한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이리라.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이 깨닫는 삶의 역설이다. 


‘합창’에서 느끼는 위로와 감동을 이런저런 말로 설명하려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한번만 들어보면 느낄 것을. 백문이불여일청(聽)이다. 2012년 한 해 동안 우리 모두가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쓰러지고 절망했을 것이다. 늘 좋은 일만 있는 인생이란 어차피 없는 것이니까. 누구보다 커다란 삶의 고통을 겪었던 베토벤이 이렇게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삶의 환희는 고통이 지난 후에야 나타난다고. 어둠을 뚫고 지나 온 빛이 더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이제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