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학생들의 책상 위 칼자국을 보여주는 사진 작업, 요정들이 나타나는 시민의 숲을 추적한 비디오 다큐, 노래방이 아니라 시를 골라 낭독할 수 있는 기기를 갖춘 방을 만든 영상설치작업…. 엊그제 졸업전 심사에서 마주했던 작업들이다. 이 밖에도 많은 작업이 어떻게 자신들의 일상과 바깥을 관찰하고 거울화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은 심사 때 받은 혹독한 질문과 충고를 바탕으로 졸업전 준비를 계속해 나가게 된다.
지방을 포함한 타 대학의 졸업전 준비 광경도 치열하고 흥미로울 것으로 짐작한다. 하나 조금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은 졸업생들의 등단과정이 주사위 던지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프랑스 학교에서는 졸업전 때 기자들과 비평가는 물론 콜렉터와 화랑계 인사들을 총출동시키느라 교장이 동분서주했었다. ‘현대미술의 제국’으로 떠오른 영국 미술학교의 졸업전 시스템에 자극받았기 때문이다. ‘yBa’로 불리는 영국 현대미술의 악동들은 그렇게 미술학교와 대안 공간을 바탕으로 치고 나왔었다.
그 귀엽고도 무서운 작품들은 피카소의 단일 경매 최고액을 갈아치우며,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좋아하는 미디어에 딱 맞는 작가들로 등극했다. 그리고 이들 작품이 가장 비쌀 때 사들이는 안목으로 세계적 ‘봉’이 된 한국인 ‘클라이언트’들은 비자금만 수사하면 미디어의 주목을 받아 난해한 현대미술을 쉽게 풀어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
한국의 돈세탁소들은 그렇게 외국 현대미술의 악동들을 적극 구원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미대에서 악동 소리를 들으며 졸업하면 교수에게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표현의 자유와 싸우며 감옥가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악동은 외국작가일 경우만 인정받아 거래되는 것. 그런 와중에서도 새로운 작가들이 끊임없이 치고 올라오는 한국 미술계는 아무리 혼탁해 보여도 갑을 문화와는 다른 ‘병정무기경신임계’의 천간을 보여주는 소중한 장이다.
문제는 해마다 ‘먹고사니즘’의 대오에 서야 하는 미대 졸업생의 숫자다. 대학원도 비싼데 이젠 박사과정이 하나 더 늘었다. 미술 박사들은 늘어만 가고 미술계도 갑을 문화로 왜곡된 우열체계로 양분돼 있다.
최근 개그맨 임경필씨가 올린 트위터 글이 화제였다. 취업률을 문제삼아 자신이 졸업한 청주대학 회화과가 폐지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갑의 횡포’가 따로 없다며 격분한 내용을 올렸기 때문이다. “피카소가 취업했나 고흐가 취업했나. 예술은 예술로서 가치가 있는 거지 취업 운운하며 (학교 측이) 학생과 동문을 우롱하고 있다”고 분개했다. 그렇다면 나는 미술대학 폐지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지방대 출신이라는 핸디캡, 작가가 되려면 필수코스처럼 여겨지는 유학비용을 감당할 가정형편이 못돼서 취업준비를 했다”는 그의 예전 인터뷰대로라면 말이다. 지방대 미대를 나와서 작가가 될 수 없고 유학을 다녀와야 인정받는다면 그 미술대학은 왜 존속돼야 하는가.
실기 (경향DB)
“예술보다 더 재미난 삶으로 만드는 예술”을 주창한 프랑스 작가 로베르 필리우는 ‘재능 없는 천재’로서 예술과 과학의 경계가 없는 유토피아, ‘천재적 공화국’에 정착할 계획이었다. 작품을 재능만으로 판단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잘했음, 못했음, 안했음’이란 등가성 원칙을 세우고 ‘영원한 창조’의 원동력을 ‘잘 못했음’에 기꺼이 귀속시켰다. 그는 무언가를 만들 때가 예술이고 완성했을 때는 비예술이며 전시할 때는 반예술이라고 했다. 전국의 모든 미대 졸업생들도 취업 때문에 작가의 꿈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시인’으로서 삶의 마지막까지 자유를 충족시켜나갈 내용과 형식을 발명할 수 있게 됐다고 기뻐할 일이다.
임민욱 | 설치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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