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 살면서 강원도를 여행할 기회가 주어졌다. 1년에 4번 발행되는 ‘보보담’이라는 사보 팀의 요청으로 정선과 영월에 사는 토박이 6인의 인터뷰를 위해 1박2일로 이웃 동네를 여행하게 된 것.
다행히 어떤 마음가짐으로 여행하느냐에 따라 매우 시시한 여행이 될 수도, 반대로 강원도에서 살면서 알래스카를 여행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서른 초반에 여행과 휴식에 대한 결핍감을 채우고자, 무작정 휴직계를 내고 1년 동안 유럽의 온갖 나라를 정처 없이 싸돌아다니고 난 후, 서울에 있는 내 집에 도착했을 때 알았다. 내가 사는 망원동이라는 전혀 신비감 없는 동네를 마치 그곳을 여행하기 위해 멀리 돌아온 여행자처럼 둘러보면, 익숙하고 비루하다 여긴 것들이 얼마나 새롭고 다가오는지. 그런 마음으로 내가 사는 강원도를 둘러보고 싶었다. 내가 사는 동네의 보물을 발견하게 될지도 몰라! 그런 설레는 마음으로.
정말로 몇 가지 보물을 발견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손으로 만들어져 인형극 무대에까지 올려졌던 유명 인형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작은 시골 박물관 ‘아라리오 인형의 집’도 굉장했고, 1960년대에 신협에서 대출을 받아 한 달간 가출 여행을 하셨다는 엄청나게 사랑스러운 ‘옥산장’ 할머니와 그가 들려주는 신비로운 수석 이야기는 리처드 도킨스의 <현실, 그 가슴 떨리는 마법>보다 더 가슴 떨리는 이야기로, 살면서 내게 두고두고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의외의 수확도 있었다. 매해 여름마다 열리는 ‘함백산 야생화 축제’를 준비하는 고한 토박이를 인터뷰하러 가는 길에 곁다리로 둘러보게 된 ‘삼탄아트마인’. 10년 넘게 버려져 있던 녹슨 폐광이 이색적인 볼거리가 가득한 문화예술광산으로 변모하여 관람객을 맞을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운 좋게 개장 하루 전날 우연한 방문객으로서 그곳을 먼저 둘러보는 행운을 누린 것.
채굴된 석탄을 광차로 실어나르던 수평갱은 ‘동굴 갤러리’와 ‘동굴 와이너리’로, 광부들의 샤워실과 세탁실, 수직갱이 있던 삼척탄좌의 종합사무동은 ‘삼탄아트마인’으로, 초대형 보일러실이 ‘붉은 벽돌 극장’ 등으로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됐는데, 그 변신이 매우 드라마틱했다.
“여긴 1000명의 광부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샤워실이었어요. 그걸 가능한 한 그대로 살려서 이렇게 엑스레이 사진을 활용하는 작가의 설치미술 전시장으로 만든 거죠.” 관계자의 말을 들으며 솔직히 “공간은 더할 나위 없이 비범한데 아쉽게도 작가나 작품이 평범하네” 하는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레일 바이 뮤지엄’으로 바뀐 삼척탄좌 핵심부, 조차장 내부로 내려가자 ‘은하철도 999’를 타고 막 외딴 행성에 도착한 ‘철이’ 같은 얼굴이 되어 입 닥치고 ‘와!’ 하는 짧고 순수한 감탄사만 허락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 때문에 “여기서 광부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600미터 아래에 있는 작업 현장으로 이동하는 거죠. 한 번에 400명씩 탔다고 하더군요” 하는 식의 설명을 들어도 침묵으로 일관한 채 그냥 본다. 어느 분이 예술감독인지 모르겠지만 전력을 넣으면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탄차나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수직갱의 대형 철구조물과 강철 로프, 석탄 먼지가 앉은 컨베이어 등을 손대지 않고 가만히 둔 건 정말 잘했다 싶다. 원형 그대로 보존된 조차장은 그 자체로 오래된 광산과 광부들이 만든 거대한 조형예술작품이며 ‘삼탄아트마인’의 랜드마크로서 단지 이걸 보기 위해서 기꺼이 서울에서 강원도 고한까지 오는 수고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만약 ‘삼탄아트마인’을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위건부두로 가는 길>라는 책을 한 권 미리 주문해두었다가 여행길에 가지고 가면 좋겠다. 작가로서 진실된 글을 쓰기 위해 영국의 북부 탄광 지대에 머물며 지옥 같은 막장 생활을 몸소 체험했던 조지 오웰의 책이다. 그 책을 다시 읽어보니 내가 그날 봤던 수직갱과 수평갱에서 과연 광부들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가장 고된 일을 하는 육체노동자에게 어떤 기분이냐고 묻지 않고 그냥 그 자신이 가장 비참한 육체노동자가 됐던 조지 오웰의 글이 화려하게 부활한 ‘삼탄아트마인’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진실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물론 함백산 야생화 비빔밥과 와인을 곁들인 디너정찬코스, 화덕 피자 등을 파는 ‘레스토랑 832L’에 앉아서 읽기에 좀 과한 책일 수도 있다. 금방 마음이 불편해질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지금 누리고 있는 비교적 고상한 생활은 ‘실로’ 땅속에서 미천한 고역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얻은 것이다. 눈까지 시커메지고 목구멍에 석탄가루가 꽉 찬 상태에서 강철 같은 팔과 복근으로 삽질을 해대는 그들 말이다”라는 문장만이라도 챙겨두자.
폐광된 강원도 정선 삼탄 정암광업소 폐갱구 앞에 버려진 탄차와 '아빠! 오늘도 무사히 (경향DB)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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