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재벌과 막장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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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마감 후]재벌과 막장 드라마

한국 TV 드라마에 비치는 재벌의 모습은 시대와 함께 변해왔다. 1987년 최고 화제작 <사랑과 야망>에서 주인공 태준(고 남성훈)은 대기업에 들어가 승승장구한다. 동생 태수(이덕화)는 건설 붐을 타고 건설회사를 일으킨다. “잘살아보세”가 국가적 구호였고, 그 선두에 선 재벌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열심히 일하면 태준과 태수처럼 호텔에서 점심으로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먹을 수 있다는 ‘희망’ 혹은 ‘욕망’을 대중에게 던져줬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러 재벌은 판타지 대상이 된다.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을 만큼 현실에서 계급적 격차가 커졌기 때문이다. 드라마 한 축에는 재벌 상속남녀가 있다. 그 상대방은 착하고 능력 있지만 아직은 별 볼일 없는 ‘개구리 왕자’ ‘온달’ 같은 남성이거나, ‘캔디’ ‘신데렐라’ 같은 여성이다.



1994년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는 백화점 창업주 아들(차인표)과 고졸 출신 매장 직원(신애라) 간 사랑을 소재로 했다. 2006년 <환상의 커플>에서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재벌가 상속녀(한예슬)가 가난한 남자(오지호)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다.



최근 들어 재벌상은 더 이상 백마 타고 온 왕자나 평강공주, 시련을 겪고 일어선 영웅이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추악한 짓도 서슴지 않는 ‘욕망덩어리’다.



MBC 주말극 <백년의 유산>에서 시어머니는 손꼽히는 식품회사 오너다. 아들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정신병원에 가둔다. 며느리가 충격으로 기억을 잃자 불륜 누명을 씌운다. 2월 방송된 SBS 주말드라마 <돈의 화신>에서는 주인공 아버지인 부동산 재벌이 내연녀가 수하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알고는 총으로 살해하려 한다.


MBC 드라마 '백년의 유산'



지난해 여름 SBS 월화극 <추적자>에는 국내 최대 재벌 ‘한오그룹’ 오너가 등장한다. 전화 한 통으로 국무총리를 호출하고, 검찰총장에게 수사를 지시한다. 사위가 자신의 그룹을 집어삼킬 것을 알고, 파멸시키기 위해 계략을 꾸민다.



재벌들이 이런 드라마를 볼까. 아마 “말도 안되는 내용”이라며 고개를 돌릴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최근 CJ그룹을 향한 검찰 칼날이 매섭다. 당초 2008년 CJ 재무팀장의 살인 청부사건과 관련해 이재현 회장의 차명재산이 수천억원에 이른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유야무야됐다. 2010년 금융정보분석원(FIU)은 이 회장이 세금을 거의 물리지 않는 조세피난처인 버진아일랜드에서 들여온 비자금으로 CJ 주식 70여억원어치를 산 걸 포착해 검찰에 알렸다. 하지만 역시 묻혔다. 그러다 새 정부 들어 ‘시범 케이스’처럼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조세피난처에 위장회사를 설립한 재벌들도 공개되고 있다. 이수영 OCI 회장 부부,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 부인 이영학씨, 조욱래 DSDL(옛 동성개발) 회장과 장남 조현강씨,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 등이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손자이자 이재용 부회장 아들이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국제중학교에 들어갔다. 부모 이혼이 ‘배려’의 사유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큰딸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은 원정출산 논란에 휘말렸다. 대한항공은 3월20일 조 부사장을 미주본부로 발령했다. 조 부사장은 4월 초 하와이로 출국해 지난 주말 출산했다. 출산을 2개월 앞두고 미국에 발령낸 것이다.






2002년 여대생 하모씨를 청부 살해한 영남제분 회장 부인 윤모씨 사건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윤씨는 판사 사위와 그의 이종사촌 여동생이 불륜관계라고 의심해 청부 살인을 의뢰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윤씨는 의사로부터 과장된 진단서를 받고 형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 호화 병실에서 지내며 최근 수시로 외박·외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쯤 되면 드라마와 현실 중 뭐가 더 막장인지 헷갈린다. 결국 대중문화는 당대를 ‘좀 과장해 비추는 거울’이 아니던가.





최우규 대중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