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눈을 뜨자 생각들이 머릿속을 기어 다니기 시작한다. 마치 수많은 벌레처럼 스멀스멀 머릿속을 헤집고 꿈틀거리며 제멋대로 기어 다니며 탈피와 우화를 거쳐 급기야는 날벌레가 되어 삽시간에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 생각벌레 한 마리를 잡아 찬찬히 살펴보고 신중하게 길러내면 때로 아름답고 멋진 벌레를 눈앞에 만날 수 있다. 빈약하고 때론 끔찍한 애벌레가 몇 번의 변신을 거치며 낯설지만 그럴듯한 모습을 갖춘 벌레가 되는 과정은 경이로움으로 가득하다. 상상력은 그렇게 생각의 한 귀퉁이에서 스스로 자라나는 벌레들을 제대로 길러내는 능력이다.”
머릿속에 벌레 한 마리를 떠올리며 이야기의 초안을 잡는다. 꿈틀거리는 벌레는 언제나 낯설고도 친숙한 존재이다. 그러니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도 벌레로부터 시작하면 좋으리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쁘게 강연 제의를 수락하고 차를 몰아 달려간다. 청중들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상상력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과 몇 가지 사례 그리고 창의성에 대한 분석이 시작된다. 그런데 벌써 청중 몇몇은 졸고 있다. 이런! 청중들이 원하는 상상력은 내가 말하려는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창의성의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근면과 성실로 무장한 노동으로 축적한 부의 성공시대는 가고, 고난 속에서 참신한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도전 정신으로 성공한 영웅들이 등장한다. 컴퓨터 하나로 엄청난 부를 이룬 창의적인 천재 빌 게이츠의 자선에 경의를 표하고 스티브 잡스에 창조적 열정에 열광하며 그가 남긴 아이폰을 다투어 구입한다. 어떻게 하면 창의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세상에 가득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왜 뜬금없이 상상력일까? 왜 새삼스럽게 창의성을 말하는 걸까? 갑자기 그걸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창의 경영 (경향DB)
나의 이야기에 졸음으로 화답했던 사람들이 옳았을지도 모르겠다. 상상력과 창의성은 이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자 슬로건이 되었다. ‘창의적 글로벌 인재의 육성’이란 표어가 내걸리고 ‘창의경영’을 내세우며 급기야는 ‘창조경제’란 말도 들린다. 학력과 연줄로 이어진 사회의 성공 매커니즘에 창의성이란 스펙을 더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도 들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나는 엉뚱한 곳에서 상상력을 말하고 있었고 전혀 엉뚱한 내용으로 창의성을 채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그건 쓸쓸하고 외롭고 힘든 삶의 여정에서 마련된 호기심과 즐거움의 영역이었거나, 현재의 법칙과 질서와 전혀 다른 세계를 상상하며 얻어지는 가능성의 공간이자 이를 통해 나와 또 다른 나 혹은 타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통로였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의 모순과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위한 생각의 원천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만으로는 사회적 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창의적인 자질을 키우려 달려온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초중고 청소년들이 수학적 논리력과 창의력을 기본으로 컴퓨터프로그램을 작성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겨루고 있다. (경향DB)
돌아오는 길, 회의가 밀려온다. 인류의 진보는 다양한 개인에 의해 발현된 창의성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화된 결과이다. 수많은 상상력의 스펙트럼 중에서 자본에 의해 부와 성공의 수단으로 고착화되고 획일화된 창의성만을 강요하는 현실에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까? 노동의 종말이 시작되고 두뇌의 착취가 시작되는 순간, 지배 권력이 전면에 내세운 것이 상상력과 창의성이다. 그것은 국가전략의 일환으로 자본을 재조직하기 위한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상상력과 창의성이 사회적 발전을 위한 개인적 자질로 내세우는 순간 상상력은 개인을 억압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도 전에 자본의 그물망으로 포획될 것이다. 사회로부터 파편화된 개인을 효율성과 이윤을 앞세운 사회의 가치로 통합시키기 위한 창의성은 끊임없이 과잉결핍에 시달릴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시작되고 있다. 거기에 저항할 수 있을까? 상상력마저 지배하려드는 이 시스템에 맞설 수 있을까?
김진송 | 목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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