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새로운 매체와 가해자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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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직설]새로운 매체와 가해자의 서사

“고작 이렇게 내 손에 쥐어질 거면서,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지. 여기 그녀의 얼굴을 첨부한다. K-Bot.jpg” 


박민정의 소설 <바비의 분위기>(‘문학과사회’ 2017년 여름호)의 주인공 유미에게는 다섯 살 위의 사촌 오빠가 있다. 그의 방은 로봇 프라모델, 만화 시리즈, 컴퓨터 외장하드에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놓은 보물섬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유미가 커가면서 알게 되는 사실은 그의 컴퓨터에 좋아하는 여자를 카메라 줌을 당겨 몰래 찍은 수십장의 근접 사진들이 저장되어 있었다는 것. 그 여자에게 거절당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에게 ‘바비’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녀의 얼굴을 닮은 로봇을 만들어 K-Bot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준다. 삼 년 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최근 한국 사회에서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거대한 여성의 성착취 동영상의 문제를 날카롭게 서사화하고 있다.


소위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이후에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성착취물 제작과 유통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고, 지난 5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안’, 약칭 딥페이크 법안이 통과되었다. 딥페이크는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특정 인물의 가짜 영상을 제작하는 것으로 여성의 신체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성착취물 제작에 악용되는 사례가 많으며 여성 연예인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얼굴을 내놓고 살아가야 하는 일반 여성들도 언제나 범죄의 대상이 된다. 다행히도 딥페이크 법안은 통과되었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텔레그램이라는 신종 기술을 통한 디지털 성범죄 방지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국회 법제사법위원들과 고위 공무원들이 법안 논의 과정에서 나누었다고 전해지는 논리 때문이다. 법원행정처 차장은 이러한 성착취 영상물에 대해 “자기는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 있다”고 말했고, 법무부 차관은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고 말했다. 미래통합당 의원은 “자기만족을 위해 이런 영상을 가지고(만들어)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갈(금지할) 것이냐”며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서 안이하고 실망스러운 발언을 했다.


이들의 말은 매우 익숙한 논리를 떠올리게 한다. 우선 법무부 차관의 말은 인공지능 기술이나 다크웹, 텔레그램과 같은 SNS라는 새로운 매체나 환경을 기존의 사회구조나 기성세대로부터 분리하려는 욕망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성욕이 활발한 청소년들의 치기 어린 장난이자 우리 때는 없었던 매체와 기술을 통해 악랄해진 성착취가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인공지능 기술, 다크웹, 텔레그램과 같은 SNS가 성착취 구조를 발생시킨 것이 아니라 증폭·양산한 것이며, 기존의 조직화된 성착취 구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축소시킨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매체가 양산하는 성착취 범죄의 문제는 예술이라는 영역과 중첩되면서 또 다른 문제를 건드린다. 여성 신체를 가짜로 제작하거나 합성하는 딥페이크 성범죄는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 프레임과 더불어 가해자의 서사화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조주빈이라는 인물의 개인적 성장 배경과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보도의 문제는 범죄자를 신비로운 완벽주의자로 재현하는 등 가해자들에게 매끈하고 매력적인 서사를 부여하면서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놓치게 만든다. 그러나 <바비의 분위기>가 예리하게 폭로하고 있듯, 성범죄자는 신비로운 완벽주의자가 아니며 개인적인 사상이나 특별한 성장환경에서 배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자아존중감을 채우지 못한 이들이 여성 신체를 폭력적으로 착취해온 체계적인 시스템에서 곰팡이처럼 양산되는 것에 가깝다.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새로운 매체와 범죄자 개인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날카로운 성찰 없이 기존에 답습되어오던 가해자·예술가 서사에 대한 질문이다.


<인아영 |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