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날 때 몸을 먼저 움직이는가, 아니면 소리를 먼저 내는가. 이 바보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이는 움직이면서 소리내고 소리내면서 움직인다!’
이 둘이 한 몸이라고 간주한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홉 뮤즈 중 하나인 테르프시코레가 음악과 춤을 함께 주관했다.
원시의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민속무용에선 무용수가 노래하고 소리꾼이 춤추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미에서 춤추는 것은 연주하는 것이고 연주하는 것은 춤추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스페인 민속춤인 플라멩코 무용수는 캐스터네츠와 손뼉, 발구르기로 박자를 만들며 춤을 추는데 그 자체가 음악적 행위다. 사실 그렇게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장고춤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잘 추는 장고춤꾼은 엄밀히 말하면 춤꾼이면서 연주자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 음악이 음악 고유의 순수한 예술로 자리 잡기 위해 무용을 배제한다. 자신을 키워준 무용이라는 모체를 떠났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이리하여 음악 없는 무용은 보기 힘들지만 무용 없는 음악은 흔한 상황이 돼버렸다.
혼자 남은 무용은 무용조곡에만 맞추어 춤을 추는 신세가 되었는데 이 암묵적 질서를 깨뜨린 이가 현대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이다. 그녀는 소위 순수음악인 베토벤, 쇼팽, 리스트, 글룩 등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터부시된 불문율에 반항한 최초의 무용가이다.
1904년 한 카툰 작가는, 맨발의 엄지아가씨 덩컨이 찡그린 얼굴을 한 베토벤의 정수리에서 춤추고 있는 풍자 만화(사진)에 ‘베토벤은 춤추기를 원치 않는다’는 타이틀을 붙여 순수음악을 침략한 이 버릇없는 무용가에게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물꼬를 터 준 덩컨 덕분에 그 후예들은 때마침 나온 레코드 음악의 등장과 더불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음악과 자유롭게 관계할 수 있게 되었다. 레코드의 등장은 음악사뿐만 아니라 무용의 역사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작곡가들은 다시 무용을 찾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초기 음악들은 대부분 무용을 위해 작곡되었기에 무용과 만나 공연될 때 완전해진다. 더 나아가 존 케이지의 우연성 음악은 퍼포먼스를 전제로 한 행위를 전제로 한다. 존 케이지의 예술적 파트너인 현대무용가 커닝험과의 공연을 보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공연되면서 춤은 음악에 맞추지 않고 음악은 춤에 맞추지 않는다. 이게 뭐냐고 불평하는 관객은, 춤은 음악에 맞춰야 한다는 근대 극장식 최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꼰대가 된다.
재회한 무용과 음악의 관계는 때론 어색하지만 다른 성숙한 관계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다. 250년 전 탄생한 베토벤도 무덤 속에서 자신의 음악에 무용가들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랄 것이다.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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