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전염병의 특효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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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와 삶]전염병의 특효약

이 시대에 책은 천덕꾸러기가 되었나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해외에서는 화장지, 식료품 사재기가 기승을 부리고, 국내에서도 택배 폭주로 기사가 과로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서점은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먹잇감 찾는 바이러스도 오지 않는다고 한다. 바이러스조차 없다고 하니 사람들은 흥미가 떨어져서 더 기피하나보다. 출판 종사자로서는 얼마나 다행인지. 출판사 사무실도 바이러스에 관한 한 청정지대여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원고 들여다보느라 하루 종일 옆자리 동료와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편집자들은 원래 그러려니 하고, 서점 상담도 일시 중단되어 영업자들은 만날 사람이 없다. 신학기 반짝 수요도 없어서 책 들고날 일이 줄었으니 출판은 강제격리, 자가격리의 충실한 이행자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사람들은 모른다. 평소에 책을 안 읽으니 물리적 거리 두기에 책읽기가 얼마나 좋은지. ‘거리 두기’라는 말이 몰인정하게 느껴졌는지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까이’라는 말도 나왔다. 거짓말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음을 어떻게 가까이하며, 정말 가까이하는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러니 이 말은 ‘몸은 멀리, 책은 가까이’로 바꾸는 게 낫다. 책읽기에 빠지면 얼굴 한 번 보자는 친구의 연락도 귀찮고, 화창한 바깥에 나가 꽃구경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재미있는 책을 읽다보면 주일예배도 빼먹기 일쑤이고, 식사시간도 자주 걸러서 일과가 한결 한가하다. 학교 못 가는 아이들이 방에서 뒹구는 바람에 복장 터지는 집들은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쥐여주고 부모가 함께 책을 읽으면 집 안이 다 조용해질 것이다.


그뿐인가. 책을 읽으면 파탄 직전인 경기 살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출판 관련업은 고용인구 많기로 유명한 업종이다. 제지회사, 인쇄소는 물론이고 출판사, 서점이 다 그러하다. 책을 읽으면 숱한 편집자, 영업자, 디자이너의 일감을 만들어주는 것이고, 주로 자유저술가와 불안정 직업인이 많은 저자, 번역가들을 돕는 셈이 된다. 온라인서점의 택배기사들도 수입이 늘고, 심심풀이 간식과 스낵도 잘 팔릴 것이다.


책읽기는 바이러스로 공포와 불안이 가득해진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전염병이 덮친 이 사회의 일상성과 비일상을 잘 이해할 수 있고, 경제 돌아가는 논리를 깊이 생각해볼 수 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자 불안을 조장하고 가짜뉴스와 혐오만 확산시키는 소식들 때문에 바이러스보다 더 치명적 정보오염에 빠지기 십상인데, 책읽기는 이 모든 오염원에서 한 발짝 물러나 전염병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한다.


책으로 전염병은 퇴치하지 못할지언정 그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들은 물리칠 수 있으니, 생각나는 대로 몇 권의 책을 나열해 본다. 윌리엄 맥닐의 <전염병의 세계사>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전염병이 인간의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인간은 또 어떻게 전염병을 일으키고 확산시켰는지 인류학적 시각으로 잘 보여주는 명저다. 비슷한 책으로는 아노 카렌의 <전염병의 문화사>도 있다. 이런 인문학서가 힘겨우면, 이미 사놓고도 의외로 읽은 사람이 드문 카뮈의 <페스트>를 읽는 것도 좋겠다. 봉쇄된 도시 안에서 인간 군상의 모든 굴절된 면모와 그럼에도 불굴의 의지로 싸우는 인간을 만날 수 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어떨까? 역병에서 피신한 사람들의 시간 때우기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요즘의 책은 밀림에서 마구 베어낸 나무로 만든 펄프를 쓰지 않는다. 펄프용으로 따로 식재를 한 나무를 쓰니 책읽기로 인한 환경파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이 산업이 무너져서 앞으로는 저자가 ‘함초롬바탕체’로 쓴 생짜 원고를 독자들이 복사해서 읽게 되지나 않을지, 나는 그게 걱정이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