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방송 촬영과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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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직설]방송 촬영과 예의

지난 주말, 동네 문화공간에 밥을 먹으러 갔다. 요일마다 주인장이 바뀌는 콘셉트로 운영되는 공간인데 그날은 ‘공유부엌’으로 밥을 해서 나눠 먹고, 음식 재료를 활용해 천연화장품을 만든다고 했다. 도착해보니 방송국 카메라가 수업을 찍고 있었다. 공공지원을 받은 프로그램이라 무료로 진행되는 점은 좋았지만, 아무래도 카메라가 있으니 신경이 쓰였다. 카메라의 존재만으로도 어색한데 요구사항이 이어졌다. 감독이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라고 물으면 “밥 먹고 알려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런 멘트를 흥분된 톤으로 해야 했다. 그런데 이 미션이 쉽지 않았다. 중간에 틀리고, 문장을 겨우 완성하면 톤이 마음에 안 들고…. 중간에 사람을 바꿔가며 20회 가까이 시도가 이어졌다. 밥을 먹는 사람도, 멘트를 하는 사람도, 촬영하는 사람도 모두 힘든 시간이었다. 반복되는 멘트를 들으며 촬영을 지켜보는 사이 모든 사람의 식사가 끝나버렸다.

 

허무했다. ‘촬영이니 어쩔 수 없지’ 싶으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주인장도 착잡한 표정이었다. 공공지원을 받은 프로그램이라, 지자체에서 방송국에 의뢰한 촬영에 협조하고 있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했다. 일단 촬영 스케줄에 맞추느라 프로그램 일정을 바꿨고, 그러면서 원래 오던 분들 대신 시간 맞는 분들을 별도로 주인장이 섭외해야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방송작가의 행태가 가관이었다. 촬영 일주일 전부터 주인장과 카톡을 주고받기 시작한 작가는 강사의 수업 내용부터 장소는 어딘지, 건물 사진은 없는지 등 다양한 요구를 해왔다. 질문은 기초 조사도 하지 않아서 답해주기조차 민망한 수준이었다. 지친 주인장이 “검색해보시면 많이 나와요”라고 하자 그제서야 검색을 해본 눈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막내 작가가 섭외 담당일 가능성이 높으니, 너무 뭐라 하지 말고 잘 가르쳐주시라고 얼굴도 본 적 없는 작가 편을 들었다.

 

그런데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작가가 강사 연락처를 물어보길래 알려주면서 “촬영 관련 부담 주지 말라”고 분명히 주의를 줬다고 한다. 그런데도 작가는 강사에게 전화해서 순서를 바꿀 수 있냐면서 프로그램에 개입했다는 게 아닌가. 상황을 전해듣고 화가 난 주인장이 촬영협조 못하겠다고 하자, 작가는 그때부터 “마음 풀어달라, 죄송하다. 촬영 못하면 방송사고인데 모든 것이 제 잘못 같다, 작가 한 명 살리는 셈치고 도와달라”는 장문의 구구절절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결국 마음이 약해진 주인장이 일정대로 프로그램을 진행할 테니 촬영을 원하면 있는 그대로 찍고 연기 요청은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촬영 당일, “한 개의 멘트를 쓰기 위해 열 가지 공부를 한다”던 그 작가는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타 방송사 프로그램 로고가 달린 카메라를 들고 온, 아는 사람 통해 알바로 왔다는 촬영감독뿐이었다. 그렇게 애원하던 작가는 섭외가 완료되자 연락을 끊었다.

 

그래도 방송에 나갔으니 홍보되고 좋은 거 아니냐고? 공간은 원래 운영 취지와 상관없이 졸지에 ‘공짜 공간’이 됐고, ‘TV 프로그램에 나온 가게’라고 홍보하는 현수막을 싸게 만들어준다는 전화를 받았을 뿐이다. 이 공간은 음식점도 아니고 돈을 받는 상업공간도 아니다. 지역에서 민간문화공간을 재미있게 꾸려가려고 노력하는 주인장의 활동을 존중해주지는 못할망정 그 사람의 시간과 노력을 이용하는 방송의 행태에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촬영 이후 주인장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예의는 눈곱만큼도 없다. 즐거워야 할 시간인데 애쓰고 함께한 보람이 싹 식어버렸다. 보여주기식 방송, 보여주기식 행정에 놀아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괴롭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카메라는 힘이 세고 유명한 대상 앞에서는 예의를 갖춘다”고 꼬집은 사람도 있었다. 제작 여건이 열악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조건이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을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방송이 중요하다고 해도, 세상의 어떤 사람도 방송을 위해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시민의 세금으로 2분5초 동안 공중파에 노출된 그 방송은, 대체 누구를 위한 방송이었을까? 일요일 점심, 동네 사람들이 모인 소박한 밥상의 수다 시간을 빼앗아갈 만큼 중요한 방송 콘텐츠였을까, 자꾸 묻게 된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