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문장은 결기가 살아 숨쉰다. 문학권력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단단한 세계관이 번뜩인다. 배수의 진을 친, 필자의 기갈이 문단을 감싼다. 70대 중반의 노작가가 던지는 날선 직설의 향연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어진다. 무정부주의자의 면모를 풍기는 일본인의 이름은 마루야마 겐지다.
6·25전쟁의 최대 수혜국가인 일본. 한때 경제동물이라 불렸던 섬나라의 전성시대는 길어야 1990년대까지였다. 작금의 일본은 국가 전체가 조로증에 빠진 느낌이다. 20년 만에 경제호황을 누리고 있다지만 중국의 약진 앞에서 또렷한 대안이 없는 상태이다. 정치 또한 마찬가지다. 전쟁국가로의 회귀를 원하는 자민당의 수구적인 행보가 일본 정치를 비추는 거울이다.
1955년 등장한 보수 통합당인 자민당은 무려 38년간 집권당으로 활동한다. 얼핏 보아도 마루야마 겐지와 자민당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다. 작가는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 국가란 국민에게 이 세상이 사랑과 친절로 가득하다는 착각과 솜사탕 같은 가치관을 심은 장본인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온몸에 총탄을 맞고, 포탄에 손발이 잘려 나가고, 진흙탕에 뒹굴다 죽어 간 일본의 흑역사를 비판하고 있다.
마루야마 겐지의 시선은 자국민이라고 예외 취급하지 않는다. 그는 강자와 영웅을 원하는 유치한 소망과, 지배자에게 무턱대고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사태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국민의 몫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탄식한다. 불끈거리는 혈기와, 극적인 사상을 꿈꾸는 불온한 감정과,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정신의 갈등이 사라진 일본인을 향한 직설이다.
소설가로서 마루야마 겐지는 낭만적이거나 현학적인 수사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는 <산 자의 길>에서 소설을 쓰고 싶다면 무엇보다 자신의 썩어빠진 근성을 똑바로 응시하고 그걸 생생하게 그리는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그에게 소설을 쓴다는 행위란 사회적인 출세나 밝고 영예로운 미래와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예술이란 무법자가 걷는 길처럼 온전히 어두운 공간을 택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래서일까. 마루야마 겐지는 일본 문학사상 최연소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이후 문단정치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의 창작공간은 자연이다. 고향 오오마치에서 자연과 욕망을 소재로 한 글을 꾸준히 쏟아낸다. 장편소설 <천일의 유리>에는 무려 천 개에 달하는 1인칭 주인공이 등장한다. 작가는 속세와는 동떨어진 듯한 마호로라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의 숨겨진 욕망을 파헤친다.
그의 시골생활을 자칫 목가적인 삶이라 판단하면 오산이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는 자신의 일상에 관한 책이다. 작가는 시골에서 감수해야 하는 새로운 변수들. 즉 골치 아픈 이웃, 고독, 범죄, 농사일 등의 어려움에 대한 직설을 아끼지 않는다. 홀로 우뚝 선 인간이 될 기회를 빼앗긴 채 나이와 육체와 생식기능만 갖춘 성인에게 시골이란 희망의 공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길들지 않는다> 역시 작가의 직설이 돋보인다. 그는 가족, 직장, 지배자에게 길들지 않는 곧은 삶을 실천하라고 주장한다.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삶. 마루야마 겐지가 인정하는 자유와 자립의 생이다. 욱일승천기를 휘날리던 침략국가로의 회귀를 외치는 일본산 극우주의자들. 그들에게 마루야마 겐지는 불편하지만 고마운 어른이다.
단정하고 수동적인 일본 유권자가 서둘러 만나야 할 작가는 누구일까. 정치현실에 둔감한 일본 유권자야말로 마루야마 겐지의 책 이름처럼 길들여지지 않아야 할 존재이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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