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형님들의 문학
본문 바로가기

대중문화 생각꺼리

[기자칼럼]형님들의 문학

원로 소설가의 신작 소설 출간을 맞아 열린 기자간담회였다. 작가와 그와 호형호제한다는 출판사 대표, 문학평론가가 앞에 자리잡았다. “OOO 형님이”, “형님이 그랬습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공식적인 기자간담회에서 소설가는 줄곧 ‘형님’으로 불렸다.

 

소설이 출판되기까지 사연을 들려주는 가운데도 형님 소설가와 또 친하다는 다른 형님 소설가 이야기가 나왔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날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아마도 ‘형님’이었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도 멋쩍었는지, “이제부터 언니라고 부를까요”라고 뒤늦게 말했지만 ‘형님’을 ‘언니’로 명칭만 바꾼들 분위기가 바뀌진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날 기자간담회에서 잔일을 처리하고 시중을 드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3월 12일 서울시 관계자들이 고은 시인의 육필 원고, 도서, 필기구 등을 전시해 놓은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내 만인의 방을 철거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다른 기자간담회도 있었다. 유명 여성 소설가의 신작 소설 출간을 맞아 열렸다. 여러모로 화제를 몰고다닌 작가였기에, 작품 외의 질문들이 많이 쏟아졌다. 고은 시인이 성폭력을 폭로한 최영미 시인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도 있었다. 작가가 생물학적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한국작가회의에서 ‘문단 내 성폭력’ 징계를 담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다시 묻자 “고은 시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술을 함께 마신 적도 없다”고 덧붙였다.

 

7년 만에 다시 문학을 담당하게 됐다. 그동안 문학의 충실한 독자는 아니었다.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저절로 전해지는 소식들이 있었다. 문단 내 성폭력 폭로가 있었고, 내가 마주했던 작가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갔다. 매년 노벨 문학상 발표 때면 이름이 오르내렸던 고은 시인은 ‘미투’ 이후 침묵에 들었다가, 소장을 통해서 소식을 전해왔다. <엄마를 부탁해>로 10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소설 1위를 차지한 신경숙 작가는 표절 시비 이후 외국에 체류 중이다. 당시 ‘거장’의 반열에 오르락내리락하던 작가들은 모두 사라졌다. 조금의 과장을 보태자면, 7년 만에 한국 문학 앞에 다시 선 나는 폐허 앞에 서 있거나, 시름시름 앓고 있는 환자 앞에 선 기분이다.

 

처음 기자간담회에서 놀랐던 것은 사회가 변화하는 속도와 달리 정체되어 있는 문학 출판계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사회 전반에서 남성중심주의와 성차별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고, 한국 문단은 ‘문단 내 성폭력 폭로’로 치부를 드러냈다. 한국 문학의 젠더감수성 부족, 문단 권력의 폐쇄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뤄졌다. 그런데 공식 석상에서 ‘형님’이라고 칭하는 모습은 문단이 어떤 관계망과 구조 속에서 굴러왔는지 일면을 보여준다. ‘형님-아우’ 속에 여성 작가가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였다. 친한 사이의 호칭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호칭은 사회적 관계를 반영한다. 형님과 소설가, 형님과 사장님, 그리고 형님과 오빠는 얼마나 다른가.

 

 다음에 놀랐던 것은 유명 작가이자, 작가회의에서 성폭력 징계를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문단의 대표적 ‘성폭력 의혹’에 대해 “생각이 없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점이었다. 문단은 작가를 데뷔시키고, 책을 출간하는 시스템으로 실체를 갖고 있다. 책과 관계없는 질문을 회피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작가로서 자신이 활동하는 공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했던가.

 

“글을 쓸 때면 언제든 약한 쪽에 서려고 노력한다. 강한 쪽은 문학이 설 곳이 아니니까.” 200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말했다. 폐허가 돼 사라지고 있는 것은 낡은 것이요, 시름시름 앓고 있는 것은 이미 수명을 다한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든, 다른 누구에 의해서든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와 문학이 쓰여지고 있다. 현 시대의 아픔을 예민하게 읽어내고 공명하는 이야기, 이것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문학이 아닐까.

 

<이영경 문화부>